시인의 체험은 삶의 객관적인 사실태와 다르다. 또한 삶의 체험의 표현으로서 시적 진술은, 현상학적으로 말해 세계에 대한 판단중지 (EPOCHE)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기묘하고 우울한 내면의 에너지가 세계와 맞닿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단면들에 새겨지는 무늬, 이 쓸쓸한 무늬의 수기(手記)를 고훈실 시인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는 일은 단순한 시 읽기의 영역에서 벗어나 시인이 아로새긴 신산한 언어적 문신이 그려놓는 세계의 지형을 더듬는 일에 진배없을 것이다. ─정 훈(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