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희 시집
시는 역설이다. 비움에서 채움보다 진정한 충만감을 느끼고, 죽음에서 삶보다 더한 생명력을 목격하는 게 시인의 시선이다. 시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비움과 채움, 삶과 죽음이 서로 갈마들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류정희의 시집 '사막냄새'(시와 사상사)는 텅 비어 있다.
'몽땅 쏟아버린 어둠으로/ 텅 비어 있는 항아리/ 쓸모없다 하여/ 장독대도 아닌/ 베란다 구석에 버려져 있다'('중심' 중에서). 원래의 쓰임새를 다한 항아리는 자기 자리에서 밀려나 누구의 손길도 미치지 않는 후미진 곳에 버려져 있다. 뒷전으로 물러나 쓸쓸한 노년의 시인처럼. 한데 시인은 그곳에서 새로운 진정성을 발견한다. '항아리는 비어 있음이/ 중심이었다/ 텅 빈 하늘이 나의 중심//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나의 빈 중심을 담아두었다'('중심' 중에서). 항아리의 본성이 비움임을, 그것이 항아리의 진정성임을 깨달은 거다. [출처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