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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예비평 (제75호 2009.겨울)

문화예술작품 문학예술작품 기타

NO.APD12300최종업데이트:2019.02.13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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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품제목 오늘의 문예비평 (제75호 2009.겨울)
  • 작품장르 문화예술작품 > 문학예술작품 > 기타
  • 발표일 2009.12
  • 발표매체 해성
  • 발표주체 57

작품설명

  • 2009년 겨울호 서문

    2009년 한국 사회를 돌이켜 보건대, 군부독재시대 이후로 지금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스트레스가 국민들에게 가중된 적은 없었던 듯하다. 2008년부터 이어진 경제위기가 실물경제의 파탄으로 치닫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적 보복에 의해 서거했으며, 용산학살이 일어나고 미디어법 강행처리로 국회가 난장판이 됐다. 4대강 사업의 졸속 처리나 세종시 문제도 시끄럽다. 그 뿐인가. 진보진영의 핵심인사라 할 수 있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 진보적 인사들의 대거 퇴출, 용산학살 피해자들의 유죄 판결 등으로 2009년 한국 사회는 그 이전까지 하나 하나 쌓아왔던 소중한 민주주의적 가치가 일거에 붕괴되고 고통과 치욕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틸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에 직면해있는 실정이다.
    한국 문학이 미학적 쇄신의 가능성을 넘어 정치적 윤전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미학적 탐색에만 몰두해왔다고 여겨지던 많은 작가들이 ‘6·9 작가선언’에 동참한 것은 주체의 고통이 어떻게 미학적 가능성을 넘어 정치적 인간으로 윤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이자 역사적 실천 과정의 일환으로 생각될 수 있는 터이다. 이에 󰡔오늘의문예비평󰡕에서는 <특집>으로 ‘2009년, 한국사회의 고통과 문학의 치욕’이라는 제목으로, 미학적 인간에서 정치적 인간으로 전화하는 주체의 가능성을 탐색해보기로 했다.
    먼저, 이득재 선생의 「미학에서 정치로 넘어가는 고통의 역치에 대하여」는 신자유주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그 역치에 다다르면서 어떻게 촉발될 수 있는지, 그에 따른 문학적 가능성은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다. 그는 우선, 작금의 한국 사회가 소비자본주의의 쾌락 욕망에 의해 무통문명이 여러 장치들로 구성되어 있는 ‘무통문명사회’라 진단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통문명의 사회’가 무서운 이유는, 무통문명이라는 시스템이 시스템을 파괴하는 행위들마저도 시스템을 재생하는 계기로 삼아버려, 자본의 증식과정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고통과 쾌락 사이의 양 공간이 무통화, 무감화에 의해 분할되고 위계화 된 무통문명 사회에서 억압된 고통을 가시화하고 해방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는 랑시에르를 참조하면서, 문학이 사회의 감성 구조에 개입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식, 즉 ‘미학의 정치’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감성의 분할에 개입하고 이를 다시 공동의 것으로 규정하는 재구성 작업을 문학이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무통문명이 은폐하는 감정의 섬세한 변이과정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신경숙의 멜랑꼴리나 박금산의 우울증적인 방식은 쾌락에 의해 파괴된 고통에 대한 감각을 도리어 방해하는 ‘미적 무위도식’일 뿐이라 일갈한다. 그가 가능성을 찾는 것은 송경동이나 이시백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웅성거림’을 ‘목소리’화하려는 노력들이다. 사회적 고통을 수반하는 신자유주의가 휘몰아치고 있는 지금, 고통에 대한 문학적 응전을 준비하는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작품이 갖는 의미가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이득재 선생이 사회적 고통이 문학적 감수성으로 전화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염두를 두고 있다면, 오창은 선생은 이와 관련한 문학사적 고찰을 심층적으로 진행해간다. 오창은 선생의 「4·19혁명, 그리고 ‘미학의 정치’를 둘러싼 징후들」은 우선 랑시에르가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학사적 맥락을 김현을 비롯한 소위 4·19세대들의 문학적 감수성에서 찾고 있다. 4·19혁명에서 5·16쿠데타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 아래서 4·19세대들은 ‘내면성을 통한 개성의 강조’라는 모토를 강조했는데, 문제는 그들이 미적 주체의 ‘감수성의 혁명’과 정치적 인간의 ‘정치적 효과’ 사이에서 발생하는 비약을 어떻게 매개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그대로 ‘문학의 정치’라는 이름으로 옹호되고 있는 과정이 최근 참조하고 있는 랑시에르식의 논리틀에 결여된 지점이라는 것이다. 혹 랑시에르의 논의가 한국 사회에서 4·19세대의 ‘미학적인 것’의 특권화로 전유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문학본질론’에 대한 세련된 판본은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있다.
    이성혁 선생은 2009년 한국사회의 불합리와 시적 역능에 대해 깊은 사려가 담긴 글을 보내주셨다. 몫없는 자들이 몫을 요구하는 정치과정에 시를 통해 참여하고자 하면서, 자본과 권력의 치안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은 시를 ‘정치시’로 규정하는 그는, 이들의 시가 지닌 삶의 실험과 미학적 실험의 결합 내지는 조우 가능성을 진단한다. 백무산의 시가 보여주는 전복과 혁명에 대한 사유, 시와 삶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송경동 시인의 선전선동시와 그 정치적 징후들, 진은영 시에 나타나는 정치적 저항과 시쓰기의 관계에 대한 천착, 김근의 알레고리를 통한 정치 풍자시, 이시영의 사실적 제시를 통한 직설적 발화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미학의 정치’와 ‘정치의 미학’ 사이의 고민이 어떻게 시적 전율로 다가설 수 있는지 독자에게 숙제로 남겨준다.
    고명철 선생의 글 「문화정책의 난제를 풀어야 할 한국문학」에서는 현 정부의 문화정책이 시장중심적, 이념지향적, 정부주도적임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또한 작금의 한국문학이 시장만능주의에 호소함으로써, 미학적 저항 가능성을 상실해가고 있음도 지적한다. 그리고 한국문학의 시장친화주의적인 태도가 문화예술인들이 보이는 문화정책에 무관심과 냉대에서 비롯된다고 전제하고 한국 문학의 존재 위의를 보증하고 제대로 된 미적 가치를 사회와 공유하기 위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논의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문화정책에 대한 문학 안팎의 적극적이고도 비판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우선, 문학지원정책의 방법적 틀을 고민하면서, 문학 창작자들을 위한 직접적 지원과 함께, 그 문학적 성과물을 사회와 적극적으로 공유하기 위해 문학인프라를 구축하는 간접적 지원, 문학의 국제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한국문학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한 방식이 되기보다는 인류 전체의 문화적 삶의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집행되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특히 남북한의 문학교류를 문학정책적 차원에서 활성화시키는 일은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강조한다.
    이번 호 <기획>에는 ‘한국예술과 통섭’이라는 화두로 두 분의 필자가 힘을 내주셨다. 통섭은 점차 전문화되어 가고 분화되어 자기 고립에 갇혀버린 지식의 장을 활짝 열어젖혀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학제 간 연구를 통해 지식의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이 단지 최근의 유행 담론 중 하나로 그칠 것인지 창조적인 갱신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비평 담론을 󰡔오늘의문예비평󰡕에서 시도한 것이다.
    먼저, 이명원 선생은 통섭을 말하기 보다는, 통섭 이전, 이후를 사유하는 비근대적 상상력이 인문주의의 주된 고민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와는 달리, 최혜실 선생은 통섭의 시대를 말하는 우리가 정작 통섭이라는 말이 지니는 의미에는 둔감함을 지적하면서 21세기형 문화예술이 통섭을 지향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 특히 스토리텔링과의 결합이 요구된다는 점을 밝힌다. 두 분의 다소 상이한 관점을 보여주는 글을 비교하면서 읽어주시기를 독자 여러분께 부탁드린다.
    <지역을 주목하라>에서는 의욕적이고 정력적인 소설 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박명호 소설가의 작품 세계를 김성환 선생이 정치하게 조명해 주었다. 또한 강혁 선생이,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공간으로 널리 알려진 ‘해운대’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지리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지역을 바라보는 윤리적 시선의 회복을 도모하는 내공 많은 글도 보내주었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아시아를 보는 눈>에서는, 한국에서 몇 안되는 베트남 문학 연구자로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배양수 선생이 ‘응웬 후이 티엡’이라는 베트남 작가를 소개해주었다. 베트남과의 물적 · 인적 교류가 활발한 오늘날, 단순히 경제적 논리로만 베트남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그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봄으로써 공통의 감성을 형성하는 데 문학이 더할 나위 없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한 작가가 보여주는 문학하기의 고통과 즐거움을 들여다보는 것은 단순히 특정 작가를 한국 문단에 소개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시선>에서는 한국문학판에서 새로운 문학지형도를 그려가고 있는 정한아 소설가와의 이메일 대담, 작가산문, 작가론을 실었다. 이메일 대담에는 김필남 선생이 함께 해주었고, 작가론에는 김형중 선생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해석과 판단> 코너에서는 정문순 선생이 자기나르시시즘적인 글쓰기에 대한 우리 문학의 고민을 보여주었고, 하승우 선생은 한국 영화를 통해 우리 시대 무의식의 한 단면을 세심하게 짚어주었다. 또한 이성희 선생은 봉화마을의 현장성을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해주었다.
    <포커스>에는 하종오 시집 󰡔입국자들󰡕, 김이설의 소설 󰡔나쁜 피󰡕, 최강민 평론집 󰡔문학 제국󰡕을 각각 이경수, 송종원, 고인환 선생이 자신의 공력을 아낌없이 부어 꼼꼼히 살펴주었다. 자칫 도드라지지 않을 수 있음에도 그들의 비평적 진단이 있기에 한국 문학의 현재에 대한 올곧은 시선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평의 안과 밖>에는 이번 호부터 󰡔오늘의문예비평󰡕에 편집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손남훈 선생이 황종연의 ‘모더니스트’적인 비평에 주목,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다사다난한 2009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덮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쉬이 그 고통의 원인들은 사라질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올곧은 비평정신을 지향하는 비평의 윤리적 태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꺾이거나 끊어져서는 안된다. 고통이 있기에 문학의 존재 이유 또한 분명해지는 것이라면, 󰡔오늘의문예비평󰡕은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여전히 한국문학판에 개입하고 비평적 지형도를 그려가는 일을 시대의 과업으로 삼아 더욱 정진해 나갈 것이다.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사랑과 질정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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