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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택 '속이는 기쁨-0905 (Duping Delight-0905)'

문화예술작품 시각예술작품 회화

NO.APD126최종업데이트:2010.01.13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프로필

  • 제·작자 정진택 [서양화]
  • 작품제목 정진택 '속이는 기쁨-0905 (Duping Delight-0905)'
  • 작품장르 문화예술작품 > 시각예술작품 > 회화
  • 발표일 2009
  • 발표주체 586

작품설명

  • 속이는 기쁨-0913 (Duping Delight-0913), 116.7㎝× 91㎝, Acrylic on Canvas, 2009
    속이는 기쁨-0811 (Duping Delight-0811), 100㎝× 80.3㎝, Acrylic on Panel, 2008
    속이는 기쁨-0913 (Duping Delight-0913), 116.7㎝× 91㎝, Acrylic on Canvas, 2009



    호·작(好·作)질의 역설
    정진택의 6번째 개인전에 서서

    송만용(동서대, 미술평론가)

    비가, 늦은 가을비가 옵니다. 비를 보니, 늦었기에 더 정감이 가십니까? 늦었기에 더 애틋합니까? 그러는 사이 늦은 비는 겨울을 안고서 창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습이 물방울 사이로 보이네요. 어린 시절 우리는 그 방울방울 속에서 형상을 그려보곤 하였지요? 마냥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려보았지요. 점점이 이어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알 수 없는 이미지로 변하곤 하였지요. 그런데 비는 그 순간을 못내 부끄러운지 달아나 버리네요.
    왜일까요? 그것은 그리고 싶은 욕망! 그것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그린 것에 대한 부끄러움... 그것인가요? 그러나 한 가지는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려지는 것에 대한 부담 없는 자유이지요? 그렇습니다. 정진택은 그려진 것보다는 그리는 과정에서 자유를 찾고자 붓을 버리고 물감을 손에 찍어 바닥에 그리고 또 손가락의 감각으로 얇게 그리고 미묘하게 색층을 겹쳐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형상을 드러내기보다는 지우는 것으로 ... 그려진 형상은 대상을 상실한 채 기호가 되어 기억 속에서 형상을 꺼내어 보라고 무언의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제들이 「속이는 기쁨 duping delight」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정진택은 왜 이렇게 그릴까요? 그는 스스로 말합니다. “어릴 적 모나리자가 그렇게 좋아보였다고 그러나 그림을 그리면서 모나리자가 쉬워졌고 그래서 피카소가 보였다고... 그런데 이들도 표현은 다를 뿐 그리는 것...” 그래서 그런지 정진택의 이전 작품은 개념성이 강한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일화로 어두운 전시장에 하얀 기둥을 세워두어 공간의 나누어짐과 연속을 보여주려고 하였던 작품이 있었는데 그 때 전시장에 들어선 분이 작품이 어디 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작가는 즐거웠을 것입니다. 왜! 자신의 컨셉이 통했으니까요. ㅎㅎㅎ 그 분에게 있어 작품은 벽에 전시되고 액자가 있어야 했는데 이 모든 것을 정진택은 거부하고자 하였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정진택은 액자는 없지만 벽에 전시되는 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습니다.
    저 생각으로는 공허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용 없는 형식이 공허한 것과 마찬가지로 개념의 강조는 결국 그림의 존재론적 의미의 약화를 초래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리기로 돌아갔는데, 그 성격이 어디 가겠습니까? 모더니즘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그이기에 표현의 형식적 순종(?)에 갇힐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바넷 뉴만처럼 얇은 색면을 덧칠하는 작업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붓은 아무리 얇게 칠한다고 하여도 두께감이 있었고 스퀴즈나 그 외 도구들은 너무 냉정하였기에 붓과 도구를 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핏, 매우 소극적인 자세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에겐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형상위에 얇게 드리워진 색채로 인해 형상은 존재하나 의미는 탈색되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미를 존재에서 탈피시켜 상상력으로 규정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최초의 인간이 놀라운 미래를 열어 보이려고 벽면에 그림을 그렸던 것같이 상상력의 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붓, 물감 ... 이 모든 것은 그림 그리기에 있어 하나의 형식이지만 작가에겐 억압이기도 하다고... 그래서 그는 그리기의 순수한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자 물감을 캔버스 위에 손가락으로 그렸던 것입니다. 마구 그렸던 것입니다. 마구 덧 씌웠던 것입니다. 얇게 감추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호작질 이었습니다.
    각 작품을 보면, 공통적으로 얇은 막과 그 막을 형성하기 위해 밀려난 두꺼운 경계의 색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치 고흐의 마티에르처럼 ... 이것은 아마도 목탄의 숙련과정에서 배어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고교시절 이후 대학까지 다들 꺼리는 목탄을 즐겨 사용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을 그린다기는 엄밀함 보다는 그저 그렸던 것입니다. 그저 그렸기에 감출 수 있었고 순간의 자유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빗방울이 맻힌 창가에서 그렸던 그림이 이내 사라지듯이 정진택의 자유는 곧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순수한 마음으로 호작질로써 그렸으면 자유로운 형상이 보여야하지 않습니까? 얼핏 보면 누구의 작품과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마치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이 ...”라는 노래가사처럼 그의 마음속에는 학습된, 전승된 형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 관계의 그물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그 필연적 속성을 인정한 것일뿐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숨기고 싶었을 뿐입니다. 감추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알아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욕심장이 입니다. 이런 전략은 이미 추상표현주의시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지 정진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호히 요청합니다. 숨기지 말고, 숨지 말고 자신을 드러내라고... 아니며 그 호작질 속으로 녹아들어가라고... 이도 저도 아닌 아슬한 경계의 줄타기를 하지 말라고... 마침 류시화의 소금인형이 말하네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 당신의 피 속으로 / 뛰어든 / 나는 / 소금인형처럼 / 흔적도 없이 / 녹아버렸네”

    이 마음이 정진택의 마음일터인데 그는 형상도 얘기도 버리지 못한 채, 그림 앞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의 유니폼 쉽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실처럼 활의 시위를 당겨 놓을까요?
    이제 창가엔 낯선 이미지가 다가옵니다. 그 사이에 숨어 있던 빛이 드러납니다. 빛은 투명하지만 다양한 색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그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렸던 것입니다. 덧 씌웠던 것입니다. 자신은 우리를 보면서 속이는 기쁨 duping delight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그와 같이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속이고 있지 않은지요?
    이 역설적 구조가 형상을 넘어선 정진택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것이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다립니다. 얇은 덧칠과 숨김의 역설로써 호작질이 정진택다운 호·작품(好·作品)으로 나타나는 그때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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