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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사람의 마음

문화분야 문학 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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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PD24653최종업데이트:2026.04.28

프로필

  • 제·작자 정성환 []
  • 작품제목 어쨌든 사람의 마음
  • 작품장르 문화분야 > 문학 > 운문
  • 발표일 20260415
  • 발표지역 부산시
  • 발표매체 및 장소 단행본
  • 발표주체 정성환

작품설명

  • 1.
    무언가를 ‘정의’하려고 언어의 사다리를 하염없이 올라가다 구름 속에서 기원을 잊어버리거나 개념의 기초를 파고 내려가다 깊은 어둠에 갇혀 지향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비, 절망, 사랑, 죽음, 불안 등을 생각하다 ‘마음’에서 멈추고야 마는 경우도 있다. 그쯤에서 ‘현상은 존재하나 실제는 고정할 수 없다’라는 애틋한 정의가 가로막는다. 어떻게 표현해도 같은 곤란에 직면하겠지만,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명명된 물질과 비물질의 복합 유기체다. ‘곤란’을 앞에 적어놓고도 ‘정의’를 통해 해명하려는 욕망이 끝없이 일어선다. 가령 ‘영혼’은 실체가 아니라 전기나 화학 작용 같은 변화다. 하지만 욕망은 충족에 닿지 못하고 끝없이 미끄러질 뿐이다. ‘마음’의 본령에 닿지 못하므로 그 변화를 보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오롯이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매 순간 ‘통섭(consilience)’의 지점들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성환 시인에게 ‘사람의 마음’은 그 스펙트럼이 인간의 정신 활동 즉 사유, 의식, 감정, 태도 전반에 걸쳐 있지만, 서정시라는 양식으로 표현되기에 그 마음은 감정의 일렁임과 이후 잔여에 애잔하게 펼쳐진다. 정성환 시인은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직선적 탐구가 아니라 그 변화의 다양하고 세밀한 양상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해서 넓은 의미에서 존재의 기획을 완성하고자 한다.

    차마 놓지 못하는 그 사람을

    눈물로 다 쏟아내고

    화엄사 가는 길

    추스르지 못한 생각들이

    내 뒤를 밟는다

    마음속 몇 줄 기도문

    잊겠다는 다짐을 왜 부처에게 하나

    삼백 년 검붉은 화엄매가

    각황전 앞에서 염불을 왼다
    ―「화엄사 홍매화」 전문

    봄의 전령처럼 SNS를 달구는 ‘화엄사 홍매화’는 실체이면서 동시에 완고한 상징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화엄 사상은 ?법계연기(法界緣起)?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봄, 새해의 시작, 희망이라는 의미를 담아 화엄사 홍매화를 반긴다. 하지만 매년 그 자리에서 피었다 지고 인내하고 다시 피었다 지는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홍매화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상념과 같다. 인용한 시처럼 “차마 놓지 못하는 그 사람을//눈물로 다 쏟아”냈다고 믿었지만 “추스르지 못한 생각들”이 “마음속 몇 줄 기도문”이 되어 시인은 ‘각황전’ 앞 화엄매에 비유되어 ‘잊겠다는 다짐’의 기도문을 염불로 왼다. 그것은 봄만이 아니라, 「가을의 습관」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문득 회동 수원지 시원한 바람 한 됫박 끌어다/막막궁산(莫莫窮山) 사람의 마음 뒤적이며/그 쓸쓸 달래면”서 몇 그루의 ‘물오리나무’와 ‘청둥오리’에 투영된 감정의 변화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서
    진짜 대가리 한번 되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툭 볼가진 못대가리 같았을까
    비딱하다고 옆으로 맞고
    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다 또 맞았다
    제 몸보다 더 큰 무게 견디다 끝내
    자리만 차지한다고 장도리에 뽑힌 못이었을까
    수영팔도시장 명태 대가리집에서
    왕년에 쓰다 남기고 온 직함들 수북이 쌓아놓고
    은퇴한 친구들이 막걸리 마신다
    북어 황태 선태 노가리 춘태 추태 꺽태라는
    수많은 이름으로 험한 물살 가르던 명태 같은 친구들이
    모여 동태 대가리 볼살 바르고 있다
    몸통으로 가는 끝부분도 살이 제법 있다
    큰 야망과 출세에 목 걸지 않은 사내들답게
    버릴 것 하나 없는 명태의 인생관과 세계관 뜯어 먹는다
    명태가 이룬 성덕의 극치에 감탄하며
    ―「수영팔도시장 명태 대가리집」 전문

    이 시집 속의 정의처럼 ‘마음’은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현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인용 작품에 드러난 “북어 황태 선태 노가리 춘태 추태 꺽태”라는 명칭은 “명태 같은 친구들”의 또 다른 잠재태(潛在態)지만 현상은 ‘동태’일 뿐이다. 하지만 “명태가 이룬 성덕의 극치에 감탄하며” 시인과 친구들은 “명태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뜯어 먹으며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음이 생각(사유)의 방향보다 실제 현상에 우선한다는 예시로 읽을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2.
    중국 송나라의 안수(安殊)는 사(詞) 「목련화(木蓮花)」에서 “무정(無情)이 차라리 다정(多情)보다 덜 괴로우리, 한 치의 그리움이 천만 가닥으로 이어지네(無情不似多情苦, 一寸還成千萬縷)”라는 탄식을 써서 남겼다. 이후로 천년도 더 지나간 지금 부산 바닷가의 한 시인은 「목련의 문장」을 적어 다음과 같이 남긴다. “그리움 남기는 사람도/그리움 달래는 사람도/생애를 걸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던/그 가난한 말들을 헤고 있습니다/누군가의 사랑을 쟁여두었다 한들 곁에 없다면/가지마다 무거운 꽃잎 달고/목이 꺾이도록 울다 지는 목련 아래서/사랑은 부끄러워집니다”라는 현대적 탄식이다. 마음은 이처럼 먼저 본성(성품)과 결합한 감정, 즉 ‘정서의 표현’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생각과 감정의 주체’로서 인지하고, 판단하며, 느끼고, 기억하는 정신 활동의 중심이다.

    누군가에게 스며들고 싶어
    사월 밤마다 꽃은 떨어지고
    낮에는 어느 하나 정해진 것 없어서
    사랑은 거침없어야 했습니다
    꽃잎은 다 떨어져 가는데
    꽃피는 걸음마다
    아무 일 없도록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사랑이 위험합니다
    저마다 사랑을 꾹 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사월을 잃거나 오월을 밑질 수 있어도
    연애는 폐허로 남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신 위해서라면 내가 먼저 떨어지는
    아름다운 꽃 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많은 생각을 거느리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봄 그저 사랑에 빠져
    그리움 실천하는 편이 더 행복합니다
    ―「사랑이 위험합니다」 부분

    그래도 붉고 붉은 피가 휘몰아치는 혁명처럼
    뜨거운 맹세라든가 혹은 노스탤지어라든가 하는
    언제부턴가 사라진 말들 찾아
    겨울 눈밭 밤새 뒤지는
    거친 짐승이라도 되고 싶었는데
    나는 어느새 겨울도 봄도 아니었다
    ―「고전(苦戰) 중이다」 부분

    마음은 정의되어도 그 실제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활용하는 순간에는 그 용도에 맞는 빛깔로 실제인 듯한 양상을 보여주곤 한다. 마음이 ‘가슴’, 즉 ‘심장’에 위치한다고 믿을 때 그런 생각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사랑’ 혹은 ‘사랑 이후의 여러 감정’일 것이다. 시인은 ‘사랑이 위험’하다고 진단한다. 어쩌면 세상은 잔인하기보다 지루하다. 초대된 단톡방에서 안부나 한 줄 띄워놓고 “대화방 창문 한참 두드리는”(「궁금해」) 심정을 읽었기에 “마음 얹어주기엔 너무 늦었고/모른 체하기에는 깊이 사랑했기에” 망설이는 화자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위해 거침없어야 할 사랑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꾹 참고 살아간다. 따라서 위험한 상태에 도달했다. 시인은 그 상태를 ‘폐허’라 규정한다. 폐허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설렘이나 기대도 무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일말의 데카당스를 거부하고 “흔들리는 봄 그저 사랑에 빠져/그리움 실천하는 편이 더 행복합니다”라는 선언은 마음이 정적인 상태에서 의지가 개입하는 태도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혁명처럼/뜨거운 맹세라든가 혹은 노스탤지어라든가”를 외치지만 실제 그가 갈구하는 것은 마음의 여러 사태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The Self)에 서는 의연한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또 다른 작품 「빈집」은 마음이 갇히거나 허공에 흩어져야만 울림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 “서랍 정리하다 어머니 주민등록증을 찾았다/오래도록 어머니를 바라본다/시월 말에 만든 주민증은 반듯한 빈집이다/그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새하얀 머리에 진홍빛 베고니아꽃이라도 꽂고/증명사진 한 장 찍어 드릴걸/별은 죽어서 빛나고/사람은 떠나서 더 생각나는 밤/내 마음 외딴방에 어머니가 불을 켠다” 여기서 ‘빈집’은 정보라는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름과 생년월일, 거주지 같은 한 존재를 그저 정보, 데이터로 환원하면 집은 곧 픽셀이지만, 시인은 기억의 촉진제로서 ‘주민등록증’을 ‘빈집’으로 비유한다. 그 ‘빈집’은 어머니라는 한 존재의 부재를 감각으로 새기면서 동시에 인지적 부정을 일으키는 중층 효과를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닿지 못했거나 너무 쉽게 잃어버린 것들을 향해 열정적으로 열린다. 마음은 생각(사유)을 거쳐 변화(창조)하기보다 직접적인 이해(감정이입)를 먼저 요구한다. 그것은 실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감정이입이 시인이 중시하는 ‘그리움의 실천’과 ‘거친 짐승’ 되기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마음은 기억이라는 생각의 보고(寶庫)를 뒤적이거나 그 근처를 배회하는 과정을 통해 상징적 비유로서 의식의 결여를 대체한다. 「첫 아이」와 「딸아, 이런 사람은 만나지 마라」 등의 작품은 오히려 ‘아버지’라는 보편적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시집에서 아버지는 “밑천 부족한 모국어로 편지를”(「오래된 이야기」) 쓰기도 하고, “공사장 공치는 날 많아 아버지가 울상이다/하늘도 비우고 비워도 비울 수 없는/마음 같은 게 있나 보다/그러니 저리 장맛비로 서럽게 운다/반지하 창밖 날씨가 종일 흐려지면/아버지 속울음 잦아들 때까지 나는 조용히 기다린다”(「장마철」)라고 회상하기도 한다. 이처럼 정성환 시인에게 아버지는 마음이 닿는 존재이면서 실천해야만 비로소 긍정이 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누구든 그 슬픔의 내력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우두머리 수사자가 일생 동안
    싸우는 이유는 가족 때문이라고 한다
    사바나 초원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몇 번의 생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가족으로부터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
    서로의 가족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끝내 수사자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애잔한 본능의 역사로
    기록될 일이다
    우두머리는 가족을 거느리느라 외로웠고
    가족은 구김 없는 척 잘 자랐다
    그리운 것들은 늘 빨리 사라지고
    금방 초원의 우기와 건기만큼 멀어져서
    서로 견디는 시간만 많아졌지만
    한 시절 슬픔의 이름을 간직한 종족답게 다시 광야로
    사바나에서 아무리 센 동물의 왕이라도
    사냥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은 얻어내지 못했다
    ―「아버지 종족」 부분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다. “누구든 그 슬픔의 내력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이라 전제하면 마음은 가장 가까운 데 있지만, 전혀 모르는 무엇으로 변하고 만다. 사자들의 영역에서 어떤 ‘수사자’의 일생을 기록하자면 인용 시와 같을 것이다. 시인은 ‘우두머리’와 같은 시어를 통해 가족을 위해 싸운다는 이념의 어떤 존재들을 되살려낸다. 그러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그 마음이 어떤 사태의 머리 위에서 쏟아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인간은 “한 시절 슬픔의 이름을 간직한 종족답게 다시 광야로”라고 외치지 않는다. ‘아버지’를 말하고 ‘종족’의 개념을 가져왔으니, 이제 모든 일은 마음이 빚는 의지와 태도의 문제일 수도 있다. 간혹, 「난데없이 정이 들어」에서처럼 “꽃도 사람도 애초에 스산한 인연에서 살아남는 것임을 안다”라고 선언하거나 「아버지라는 섬」의 “어디 자식만큼 외롭게 한 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에 미쳐 개인이 존재의 최종 심급이라 믿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은 마음을 생각보다 실제 실천, 그 움직임과 퍼져 나감, 확장성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마음’이란 결국 ‘인간’이란 유적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나는 여름 수영강 기슭에서
    숭어의 꿈꾸는 가슴과 어여쁜 지느러미

    그리고 부드러운 목과 비늘이 눈부신
    머릿결을 훑어본다

    숭어는 은빛 배를 까뒤집어
    하늘 찌르며 강의 여윈 잠을 깨웠다

    사는 일은 자신을 하나도 남김없이 소모하는 것
    숭어가 모를 리 없고 멈출 리 없다

    강가에 서서 나는 늙고 가난하여
    힘이 없다고 말하였지만

    모두가 흘리는 눈물로 갈증을 삭이는 것이라며
    숭어는 더 힘찬 날갯짓을 들려준다

    숭어가 두려움이나 부끄럼 없이
    광안리 바다에서 지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마음속에서 한 마리 새가 일어나
    하늘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숭어」 전문

    지역이 어디든, 서해든 남해든 어디든지 간에 숭어를 낚아 올리는 마음이 다 같을 수 있을까. 환경과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론으로 타자로서의 숭어를 읽자는 것이다. “숭어가 두려움이나 부끄럼 없이/광안리 바다에서 지치지 않고 돌아오는” 행위 자체는 무의미하지만, “마음속에서 한 마리 새가 일어나/하늘로 날아가”는 상상을 열어준다. 다가갈 수 없다는 시공의 조건이 아니라 나는 ‘숭어’, ‘물오리나무’ 같은 자기 실존의 형식이 결국 감옥과 같은 것이다. 시인은 여기서 벗어나는 마음을 말한다. “강가에 서서 나는 늙고 가난하여/힘이 없다고 말”하는 발화를 거부하면서 숭어는 여읜 강을 차고 올라 “은빛 배를 까뒤집어”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나 마음을 읽자고 하지만 현상만 보게 되는 것이 현실이고 사실이다. 정성환의 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


    3.
    시의 위상 변화를 생각해 본다.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마음 쓰인다’ 하면 또 다른 정의의 개미 늪에 빠질 것 같아 감정의 그 어떤 동조 없이 생각만 한다. 시는 창조의 망치(언어)에 박힌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가, 신의 선물이자 저주였다가, 존재의 집이었다가, 의식보다 광대한 무의식의 바다에 빠진 자아의 빨간 구명정이었다가, 이제는 위약효과(placebo effect)나 바라는 처방전조차 필요 없는 부정기 약물이 되어버렸다. 이런 작금의 상황에서 정성환 시인은 구태여 기준이나 정의 같은 것에 매달리지 않고자 한다. 「동백 북방한계선」을 안다면 이 땅의 기후와 노력을 조금은 이해하겠지만, 모르는 척 울어주는 「곡비(哭婢)」의 곡을 지나 비록 「빈집」이지만 마음이 깃들 만한 곳을 찾아 우리에게 돌려준다.

    지켜야 할 어린 새끼가 있는 자는
    누구나 집을 원하듯
    비바람 세차게 장생포 앞바다 때리는 날
    어미 고래는 집을 상상한다
    우리 집 있으면 젖지 않을 텐데
    사람들 눈이 닿지 않고
    사람들 마음도 닿지 않는
    깜깜하고 아득한 저 깊은 바닷속 떠도는
    행려의 날들
    물가에라도 집을 짓고 싶다
    가진 적 없는 우리 집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태화강 지나 대곡천 깊숙이 거슬러 올라와
    홀연히 제 몸 바위에 던져
    영원히 살 집 새기고 있다
    한데서 웅크리던 어미의 슬픔
    이제 좀 가벼워질까
    ―「울산 반구대 고래 암각화」 전문

    여기까지 와서 비로소 마음이 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시를 쓴 정성환 시인도, 시를 읽게 될 독자들도 “사람들 눈이 닿지 않고/사람들 마음도 닿지 않는/깜깜하고 아득한 저 깊은 바닷속”이라는 공간을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바람과 희원(希願)이 ‘인간의 마음’을 통과하거나 변형되지 않으면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환 시인은 우리가 왜 이 언어의 밖에 서야 하는지 이번 시집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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