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사하구 다대포구 후릿배 앞에는 조촐하게 차린 고사상을 둘러싼 후리소리보존회 회원들이 엎드려 있고, 소리꾼 전영철(54) 씨가 한껏 목을 가다듬어 고사소리를 풀어낸다. 멸치잡이 가는 다대포 어부들이 지극 정성을 다해 올리는 용왕제를 굽어살펴 달란다. 풍악 울려 배 띄우고 만경창파 들어갈 때 순풍 만나 풍어만선 해줍시사 소원성취를 빌어 올린다.
구수하면서도 애원성을 띤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바닷속의 용왕님 단잠을 깨워서라도 선원의 안전과 풍어를 당부해 보겠다는 간절함이 소리 속에 배어 있다. 바야흐로 다대포후리소리의 서막을 소리로 풀어낸 것이다.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가 그물 쳐서 멸치떼를 후려쳐 그물 당기고, 그물에 걸린 멸치를 털어내는 바닷일은 예부터 고된 일이었다. 옛사람들은 이런 고된 일에 소리를 첨가하여 소리꾼이 메기는 앞소리를 따라 일꾼 모두가 뒷소리를 받으면서 일의 고됨을 잊고자 하였기에 신명이 붙으면 흥겨움으로 일터가 들썩였다.
삼면이 바다였기에 바닷가에서 벌어지는 후리소리는 바닷일 가운데 일상이었다. 수영의 '좌수영어방놀이'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바다에 펼친 그물을 당기거나 그물을 터는 일은 온몸을 다해 힘을 쓰는 일이기에 소리목도 굵고 힘찼다. 앞소리꾼도 번갈아 가면서 맡아 어부들의 흥을 돋우고 신명을 풀어냈다.
다대포는 포구에 목재공장이 들어선 1960년부터 멸치잡이를 위한 후리질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대만의 동쪽 속칭 낫개(두송반도 쪽)와 다댓개(삼미조선 쪽) 사이에 있는 야망대에 올라 멸치군을 확인하면 낫개에 내려와 배를 타고 그물 쳐서 징을 울려 해변(어장)에서 벼릿줄을 당겨 어장으로 풀어올리고, 그물의 고기를 털어 소쿠리로 퍼 나르던 다대포후리질은 다대포후리소리로 남아 다대포에 전승되고 있다. 지금의 엄공렬, 차태화 씨 등 예능보유자들이 소리를 메기고 백종근 씨는 풍물을 메긴다.
전영철 씨는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서 태어나 8살 때 부친을 잃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10살 때 모친을 따라 연고도 없는 부산 감천으로 이사 온다. 산골 소년은 처음 보는 바다에 반했다. 학교가 파하면 개구쟁이들과 어울려 바다에서 살았다. 해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1982년에는 리비아에 나가 산업현장에서 살아남는 법도 배웠다. 30살 때 결혼해 칼국수 분식점도 열고 주류관계 사업에서 돈도 벌어 보았다. 1995년 마을 어른 엄공렬 선생의 권고로 다대포후리소리 발표회장을 가게 되었다. 감천2동청년회 봉사회원 10여 명과 함께였다. 평소 민요 등 우리 소리를 좋아해 관심이 많은 데다 민속이라는 데 흥미가 끌렸으나 발표 회원 중 노인이 많아 실망했다. 그래도 내친김에 보존회에 입회하여 풍물부터 배웠다. 1년 후 영철 씨와 정영만, 김덕철 씨 등만 남았다. 7년 뒤에는 김덕철 씨마저 제주도로 이사 가는 바람에 결국 전 씨 혼자만 남아 소리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초대 예능보유자 김암우(1927~1997) 선생에게서 '그물 배에 싣는 소리'와 '용왕제' 그리고 '풍어소리'(칭칭소리)를 배웠다. 소리꼴을 메모하여 기억에 담았다. 이후 스승의 소리를 담은 카세트테이프를 구해 집에서 익혔다. 두 아들에게 받는소리를 가르쳐 영철 씨가 앞소리를 메기면 아이들이 뒷소리를 받게 하는 식으로 소리를 익혔다. 음악공부는 중학교 음악수업 시간이 전부였지만 민속 현장에서 앞소리 하는 어른들의 소리목을 따라 부르면서 김암우 스승의 소리꼴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용왕제 고사소리가 특히 가슴에 와 닿았다. 어린 시절 굿청에서 들었던 만신네 고사굿 감흥으로 소리를 배웠다. 스승의 사후엔 차태화 선생에게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민속현장의 놀이마당에서 앞소리를 맡아서 하기 시작한다. 2006년 4월에는 용왕제 고사소리를 비롯한 앞소리로 예능 후보로 지정받았다.
한편으로 보존회에 젊은이들의 영입을 서둘렀다. 50대를 중심으로 보존회 후원회도 만들어 다대포후리소리가 젊어지도록 노력했다. 이 때문일까, 올해 5월의 부산시민속경연에서 당당히 대상을 받았다. 이젠 목표를 전국대회로 삼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다. 민속을 즐기는 청년 회원들을 더 영입해 매주 토요일 다대포후리소리를 집중적으로 연습하면서 내실을 다지고 있다.
오는 10월의 전국민속축제를 마칠 때까지 개인생활도 접었다. 이제 다대포후리소리보존회는 곧 전수회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장성한 두 아들이 아버지의 민속사랑을 자랑스러워하기에 더욱 기쁘다.
첨단시대에 다소 굼뜬 느림이란 지적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이 굼뜬 느림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정서였으며 옛 어른들이 지녀왔던 품성으로 민속에 그 흐름이 유장하게 흘러왔던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