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본명/채완 采完) 선생은 1949년 초기의 부산 미술가들인 김종식 김윤민 등과 <토벽>동인을 결성하는 등 70년대 의욕을 불어넣고자 앞장섰던 사람이다. 경남 의령 태생인 그는 일본 오사카미술학교를 거쳐 광복 후 마산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한 이후 전쟁후인 1953년 영남상고로 오면서 부산에 정착하였다. 6.25전쟁 때는 서성찬 등과 종군 보도반으로 종군하였고 스케치한 100여 점의 기록화로 부산 미공보원에서 최초의 <전쟁기록화전>을 열기도 하였다.
"그는 유난히 스케치 여행을 좋아해 뱃길이 어려웠던 60년대부터 제주도를 자주 찾았다. 해녀들을 즐겨 그려, 해녀를 소재로 삼은 최초의 화가로 꼽히기도 한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6점의 작품 중 3점이 제주도의 인상을 그리고 있다. 이시기의 작품들은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의 얼굴묘사는 다소 탐미적인 인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오히려 그의 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나 구도의 탄탄함이 유연하지만 힘이 다소 거친듯한 필법의 유체로 구리빛나는 해녀와 소라 바닷가 풍경을 즐겨 그렸다. 초창기의 척박한 문화 환경과 불안정 했던 시대의 질곡과 변화와 생활의 파란에도 불구하고 부산 지역에 끝까지 남아서 삶과 예술의 뿌리를 내리고 묵묵히 생애를 마칠 때 까지 미술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고 지켰던 토박이 미술인이라 할 수 있다. 부산 특유의 환경들이 가꾸어낸 기질로 해서 거칠기는 해도 감수성이 투명하고 개방적이고 낙천적이며 자유분방하다.
1963년 한성여자대학(경성대학교 전신)에 들어가 작고할 때까지 가르쳤으며 문화환경이 열악했던 시기임에도 12회의 개인전을 여는 등 창작활동 뿐만 아니라 과 미술인들과의 교류에도 정렬적이었다. 예총부산지부장과 부산미술협회 지부장을 맡아 지역 문예중흥을 꿈꾸며 바쁘게 뛰었고, 완벽하진 않았으나 최초로 부산미술사를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단발행사로 끝났으나, 그는 1966년 부산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규모 공모전인 <한국국민 전람회>를 창설해 개최하였고 우신출, 신창호 등과 <부산일요화가회>를 만들어 지도교수로 미술저변인구 확대에도 정열을 쏟았다.
평소 애주가로서도 정평이 나있어 스케치를 나설 때면 「휘발유(소주)」부터 챙겼다. 단짝이었던 서성찬은 걸핏하면 그를 지목해 농담했다.
「저 친구는 노상 알콜로 몸을 절여놔서 죽어서도 썩지 않을 끼다...」
소설가 신태범씨의 부산문화야사 <국제신문. 2001.3>를 보면 그는 자기 집 담장을 벽화로 채우기도 하고, 국제신문 연재소설 삽화를 그렸으며, 60년대 기념행사에 곧잘 선보인 전차의 장식그림도 도맡아 그린 생활화가 실천화가였다. 그는 생애 마지막 날에도 「휘발유」로 몸을 데우며 일요화가회와 밀양에서 스케치를 하고 돌아왔다. 결국 그는 근라 불시에 달려든 고혈압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작고 할 때까지 1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동아대학, 부산사범대학 등에서도 강의하였으며, 부산시 문화위원을 역임하였고, 1964년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제5회 개인전 "임호작품전"(부산공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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