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아카이브

HOME 예술아카이브 기본DB

해당메뉴 명

메뉴 열기닫기 버튼

기본DB

최민식

문화예술인 시각예술인 사진

NO.AGD56최종업데이트:2010.01.15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프로필

최민식

  • 분류문화예술인
  • 이름최민식 / 崔敏植 / Choi Min Shik
  • 생년월일 1928년
  • 출생지 황해도 연백

인물소개

  • 2013년 5월 인물스페셜

    ○ “그 분은 지금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계실 것이고 아니면 베토벤을 듣고 계실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주무시고 계실 것입니다” 이 말을 생전에 남들이 저에게 최민식 선생의 근황을 물을 때면 입버릇처럼 답했던 말이다. 이 처럼 사진가 최민식 선생은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사진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헛되이 보낸 순간이 없었다. 오로지 사진만을 몸으로 실천하셨던 이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였다.

    최민식 선생은 1928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그는 소작농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지독한 가난과 함께 자랐다. 12세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몸도 성치 않았기에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고된 소작농 일을 해야 했고, 이후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을 나와 품팔이, 지게꾼, 공장 일, 자동차 기능 일, 막일꾼 등 그야말로 안 해본 일을 찾기 힘들 정도로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그의 꿈은 화가였다. 6·25전쟁 참전 뒤 1955년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 중앙미술학원에서 2년 동안 수학했다. 낮에는 식당이나 인쇄소 등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의 한 헌책방에서 그의 운명을 바꾼 한 권의 책을 보게 된다. 그 책은 에드워드 스타이겐이란 사진가가 기획하여 전시를 한 사진들을 책으로 묶은 것인데 제목이 이다. '인간은 하나'라는 슬로건 아래 총 68개국 256명의 사진작가가 찍은 503점의 작품을 선별하여 전시를 하고 책으로 묶었던 것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 젊음과 늙음, 절망과 희망, 갈등과 화해의 장면들이 들어 있다. 이 후 선생께서는 귀국하여 그림 대신 사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라이카 M3를 들고 자갈치를 누비면서 독학으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사진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오로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카메라를 손에 놓지 않으셨다. 선생에게 사진이 그의 삶이고, 삶이 사진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사진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사진을 하는가?” 지난 50여 년 간 나를 괴롭혀 온 질문들이다. 이 물음은 다시 “삶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라는 문제와 일치된다. 그러한 문제들과 평생을 싸워 왔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사진작가의 길을 걷겠다고 선생의 저서 <사진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혔다. 이렇듯 선생은 자신이 왜 사진을 찍어 왔고, 찍어야 하는가에 대해 작가 내면에서 치열하게 고민을 해온 것이었다. 고민의 해답은 다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셔터를 누르는 것이었다.


    ○ 그의 눈과 렌즈는 항상 가난한 사람에게로

    최민식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다. 자갈치 사진가, 거지를 찍는 사진가 등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답고 멋진 사진을 찍기를 좋아 할 것이다. 그러나 최민식 선생의 눈은 항상 낮은 데로 향했다. 평생을 같이 해온 카메라의 렌즈 역시 한없이 낮은 데로 움직였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사진으로 빈곤 추방의 대서사시를 썼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 화려함이나 거창한 기교도 없다. 그의 눈은 졸고 있는 시장사람들의 얼굴에, 장애로 다리를 끌며 신문을 돌리고 있는 목발에, 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고정되어 있다. 렌즈를 통해 아픔을 응시하고, 희망을 꿈꾸며 셔터를 눌렀다. 사진가 최민식 선생이 추구하는 것은 가난한 삶의 리얼리티이다. 남루와 고통 없는 밝은 사회, 굶주림 없는 지구촌을 염원하며 셔터를 눌렀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필름에 가난한 자를 담았다. 이 시대의 위대한 종군 사진가인 로버트 카파나 제임스 낙웨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촬영 했듯이...
    사진은 그에게 종교이상이었다. 그에게서 성자(聖者)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 리얼리즘의 충실한 실천자

    최민식 선생께서는 리얼리즘의 신봉자 이자 충실한 실천자였다. 앙리 카르띠에 브레송이 결정적인 순간을 추구했듯이 최민식 선생 역시 쁘레송 못지 않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다. 비 연출, 스냅숏을 외치며...
    “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나는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진실한 창작을 위한 자기 도전이 있을 뿐, 후미진 곳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머무는 곳은 어디라도 내 사진의 영역이 된다. 그곳은 가식적은 모든 것을 부정한다. 나는 고통에 처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우는 사람, 침묵 그리고 미소…, 이 모든 것들을 사진에 담아왔다. 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만이 지닌 정신적 가치와 풍부함을 발견했으며, 그들을 통해 물질적 번영에만 의존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려 했다”라고 말씀했다.

    ○ 임 세바스틴 신부와의 운명적 만남

    서민들의 궁핍한 일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 인해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국가적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정보부에도 수차례 불려가야 했다. 반공방첩의 구호가 난무하던 시절이었으니 사회의 어두운 부분들 만 골라 촬영하는 최민식 선생을 눈에 가시처럼 싫어했을 것이다. 심지어 간첩으로 오인을 받아 사흘이 멀다 하고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만 선생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러한 노력 덕분인지 선생의 모습을 지켜 본 한 독일인 신부는 선생을 후원하게 된다. 바로 그분이 분도출판사의 임 세바스틴 신부님이다. 임 세바스틴 신부와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었다. 임 세바스틴 신부는 당시의 돈으로 꽤 큰 금액을 매달 선생에게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인간 4집에서 8집까지 5권의 책을 도맡아 출판까지 해주었다. 이러한 임 세바스틴 신부의 도움은 사진 찍느라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줄 수 밖에 없었던 선생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최민식 선생은 보답을 위해서 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고 생전에 회고를 했다.

    아무튼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국내에서는 환영받지 못한 선생의 사진은 사상이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외국에서 오히려 더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선생의 사진들이 외국에 소개되는 것을 좋아 할 리가 없었다. 언젠가 독일에서 전시를 할 때인데 정부에서 여권을 내주지 않아 전시장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1967년 영국 사진연감에 스타 사진작가로 선정돼 작품이 게재되면서 세계적인 사진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 미국을 포함한 7개국에서 10여 차례의 전시를 했었다.


    ○ 최민식의 스승들

    선생은 유난히 베토벤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강의 때 마다 베토벤 이야기는 꼭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귀가 멀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위대한 걸작을 남긴 베토벤의 삶은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위대한 스승이었다. 선생은 비단 베토벤 뿐 만 아니였다. 시대가 나은 위대한 사상가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그들의 정신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결정적인 순간의 작가 쁘레송에게서 비 연출, 빛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된 찰라의 미학을 받아들였고, 워너 비숖, 유진 스미스, 쿠델카, 살가도르에게서는 휴머니즘 정신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 난민, 포로, 노동자, 굶주림에 지친 가난한 자들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사진을 조금 알려고 하니 나이가 너무 많이 먹어 버렸다”고 했듯이 이처럼 평생을 찍으면서도 겸손해했고 자신의 사고가 굳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했다. 그 노력중의 하나가 독서였다. 선생의 자택 작업실에 들어가 보면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보고 놀란다. 조그만 책상이 놓인 자리를 빼고 나면 사방이 책으로 에워 쌓여 있다. 족히 수 천 권은 될 것이다. 철학,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론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두루 섭렵을 했던 것이다.


    ○ 여든 살의 청년 최민식

    언급했듯이 최민식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감히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웠다. 50년을 넘게 해오면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 같은 의지는 여든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식지 않았다. 여든이 넘어서 출판된 책만 해도 족히 10여권이 넘을 것이며, 참가했던 전시 역시 10회 이상 되었다. 그리고 강의도 많이 다니셨다. 지역의 문화 센터는 물론이고 선생을 찾는 곳이라면 전국어디를 막론하고 다녔으니 그 열정은 가히 젊은이 못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은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 하셨다. 그 누구도 이렇게 갑자기 떠날 것이라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찍을 거지가 없으니, 이제 인도에 가서 거지를 찍어 온다고 어떤 이들은 수근 대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은 개의치 안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자는 되묻고 싶다. “당신들을 하나의 주제를 평생토록 해보기나 했냐고...그리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 카메라 들고 다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선생은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입버릇처럼 “아프리카를 찍고 싶다”고 했다. 어디서 그런 열정적인 생각이 솟아나는지 가히 선생은 청년임에 틀림없었다. 선생은 사진을 입과 머리가 아니라 부지런한 발과 따뜻한 가슴이 먼저인 사진을 하셨다. 필자가 선생을 존경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 위대한 사진집 시리즈

    한국사진의 1세대라 불리우는 분들도 불과 몇 점의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후세들에게 이름을 남기고 있다. 반면 최민식 선생은 생전에 너무 많은 걸작들을 남기다 보니 그 가치가 과소평가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 걸작들을 담은 사진집이 시리즈이다. 사진가가 평생 그럴 듯한 자신의 책 한권 남기기가 쉽지 않은데 선생께서는 사진집과 에세이 집 등 수 십 권의 저서를 남기셨다. 그 중 단연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책이 바로 시리즈다. 생전에 14권까지 내셨다. 책에 수록된 사진들이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였기 때문에 책이 잘 팔리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출판을 했다. 이유는 수 십 만장, 수 백 만장을 찍어도 출판되지 않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사장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조만간 유고집으로 15집이 나온다고 한다. 최민식 선생을 가셨지만 수많은 주옥같은 걸작들이 사진집 <휴먼> 속에서 영원히 깨어 있을 것이다.

    사진집 말고도 사상서, 에세이집 등도 많이 저술하셨다.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낮은 세상의 이야기를 선생 특유의 휴머니즘 정신을 바탕으로 풀어낸 책들이다. <사진은 사상이다>, <리얼리즘 사진의 사상>,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종이 거울속의 슬픈 얼굴> 등의 저서들이다.


    ○ 수많은 자료 국립문서 보관소로

    선생께서는 생전에 수없이 많은 걸작들을 남기셨다. 50년 이상을 오로지 사진만을 생각하고 셔터를 눌렀으니 그 양은 실로 어마어마 했다. 2007년 부산시립미술관에 사진 70점을 기증했고, 2012년에는 국가기록원에도 필름과 작품, 카메라 등 13만 여점을 기증하셨다. 너무 많은 분량이다 보니 이제 혼자서 관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기증을 한다고 했다.
    국가 원수를 지낸 분을 제외하고 개인의 자료가 보관된 경우는 김수환 추기경을 제외하면 최민식 선생의 자료가 최초이다. 한 때는 사회의 구석진 곳만을 찍어 댄다고 수많은 고초를 당했는데, 그런 자료들이 국립문서 보관소에 보관된다고 하니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선생께서는 가고 없다. 선생이 남긴 사진들은 가슴 저미는 향기가 묻어나는 시대의 목격자로서 역사적 증언자로서의 위대한 기록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인류의 평화와 행복, 사랑을 위한 위대한 업적이기도 하다.

    -------------------------------------------------------------------------------------------------------
    글쓴이 :문진우
    문 진 우(文 鎭 優 / Moon, Jin Woo / 59년 부산생)
    □ 경력
    ○ 부산매일신문 사진부 데스크 역임
    ○ 포토갤러리 051 관장 역임
    □ 전시
    ○ 개인전
    - 1993년 :「불감시대」 (부산일보 전시실 / 부산) 사진집 발간
    - 2011년 :「하야리아 사진속에 잠들다 」(경성대학교 제1미술관 / 부산)
    포함 개인전 11회
    ○ 기획전
    - 1994년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전」 (인데코화랑 / 서울)
    - 1996년 :「한국 사진가연합(민사협) 대한민국 환경전」 (예술의 전당 / 서울)
    - 기타 단체전 수십회 참가
    □ 현재
    - 프리랜서 사진가 / 동아대학교출강 / 부산MBC ‘포토에세이 골목’ 진행

학력사항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내용(표)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학력사항 - 학습기간, 학교, 전공, 학위,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학습기간 학교 전공 학위 비고
일본 동경 중앙미술학원

주요활동사항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내용(표)을 보실 수 있습니다.

주요활동사항 - 년도, 활동내역,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년도 활동내역 비고
2008 국민포창 수훈  
2005 부산예술상 수상  
2000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 수훈  
1987 예술문화대상 수상  
1970 1970~1986 :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7개국에서 초대개인전 10여 차례  
1968 1968~2010 : <휴먼 1집> ~ <휴먼 14집>,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사진은 사상이다> 등의 산문집을 포함 30여권 저서 출판  
1967 부산시 문화상 수상  
1962 1962~ :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20여개국 공모전에서 220여점 입상 입선  
**자료출처:김달진미술연구소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개인전
2006 금호미술관
2006 부산시립미술관
2007 부산 고은미술관
2007 부산 에코센터 전시관

*수상
1967 부산시 문화상
1987 예술문화대상
1994 봉생문화상 등 13개 문화상 수상
2006 동강사진상, 부산예술상
2007 서민작가상
2008 대한민국 국민포장 수상

*저서
사진집등 25권
 

해당장르

  • 장르 문화예술인 > 시각예술인 > 사진
  • 역할 사진가
  • 대상 일반인

교육활동

    등록된 교육활동이 없습니다.
자료등록:(재)부산문화재단 -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