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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성

문화예술인 시각예술인 사진

NO.AGD569최종업데이트:2012.09.24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프로필

정인성

  • 분류문화예술인
  • 이름정인성
  • 생년월일 1911년
  • 출생지 경남 양산시

인물소개

  • "부산문화예술 전자아카이브" 2012년 9월의 인물스페셜


    한국 리얼리즘 사진미학의 개척자 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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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 사진이 도입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876년 개항이후 일본인 거류지였던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초량왜관은 현재 용두산공원 주변 광복동, 남포동, 대청동, 동광동, 신창동, 창선동 일대를 말한다. 일본에서 들어온 사진사들이 이 지역일대에 사진관을 개설하고 영업을 하면서 사진은 정착되었다. 사진이 정착되었다고는 하지만 예술활동 즉 창작활동이 아니라 사진관을 중심으로 한 영업사진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정작 부산에서 예술사진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그 시기로부터 50년이 훨씬 넘는 1932년 ‘부산여광사진구락부’가 생겨나면서이다. ‘부산여광사진구락부’는 1930년대 부산의 대표적인 아마추어사진단체였다.(그 이전에도 몇몇 단체들이 있었지만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음)정인성은 바로 이 ‘여광사진구락부’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사진작업에 정진을 하게 되었다.
    정인성은 부산 사진계의 1세대로 꼽힌다. 1911년에 태어나 1996년에 유명을 달리한 그는 50년대 초까지 임응식(林應植)과 더불어 부산 사진의 여명기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왕성한 활동을 한 것에 비해 임응식에 비해 후학들에게 덜 알려져 있다.
    정인성은 1911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유복했던 덕분에 일찍부터 서울로 유학, <휘문고보>를 졸업했는데 사진을 접하게 된 것은 <휘문고보> 재학시절이었다. 처음엔 미술반에서 서클활동을 하다가 점차 사진조형에 눈뜨게 되었다. 사진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고, 1933년에 <동경사진학교(東京寫眞學校)>에 입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사진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1935년 귀국과 더불어 울산에 자리를 잡게 된다. ‘울산사진연구회’를 결성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36년 부산으로 옮겨와서 ‘부산여광사진구락부’에 입회를 하면서 본격적 활동을 들어갔다. ‘부산여광사진구락부’의 회원들은 일본인들이 주축이었다. 조선인으로는 임응식이 최초였으며 그 다음으로 정인성이 회원이 되었다. 이후 창협(한국창작사진협회)의 모태가 된 ‘부산사진동인회’를 만들어 지도하다가 1960년대 초에는 창협을 결성하여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부산시향 최초의 상임 지휘자였던 오태균 선생과 함께 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전신인 문총(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초대 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활기찬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정인성의 사진작가로서의 면모는 1971년 정인성 사진전에 즈음해 인사말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은 이명동(李命同, 월간사진예술 발행인) 선생의 반응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이명동 선생은 “내가 감히 어떻게 정인성 선생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논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평생을 오직 순수예술 사진에만 몸을 담았던 훌륭한 작가였다”고 했을 정도로 사계(寫界)에서 정인성 선생의 족적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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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9년 세상에 빛을 본 사진은 거의 20세기 초기까지 회화를 흉내 낸 픽토리얼리즘(회화주의)사진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중반을 거치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진운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카메라의 기계적 특성을 이용한 사실적 표현이다. 미국에서는 알프레드 스티클리치를 중심으로 한 분리파 운동(photo Sesession)이 일어났고, 192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신흥사진운동에서 새로운 영역으로 제기된 리얼포토(real photo : 신즉물주의 사진)가 등장하게 되었다. 신즉물주의는 원래 미술 용어로 문학에서는 표현주의의 관념적이고 주관적인 경향을 배제하고 사물의 본질을 냉정하게 묘사하려 하는 입장으로서 르포르타즈(Reportage)적 요소가 강조되었다. 사진에서는 극단적인 세부 묘사 즉 리얼리티를 사진 최고의 심미적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 주류가 되기 시작했다.
    정인성의 작품세계의 주류는 앞서 언급한 신즉물주의를 기조로 한 리얼리즘이다. “사물로 하여금 사물자신을 설명케 하라”고 주장하면서 리얼리즘 사진들이 추구하는 비연출, 스냅샷이라는 정통을 고스란히 유지했다. 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 앙리 까르띠에 쁘레송이 평생을 추구했던 정신이기도 하다. 주로 흑백사진을 많이 찍었는데(후기에는 간간히 컬러를 찍기도 했음) 흑과 백사이의 계조를 잘 재현했고 빛과 톤을 일관되게 유지시킨 그 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유지해 나갔다. 화각이나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성은 한 장의 사진 속에서도 스토리텔링한 요소들이 잘 담겨져 있다. 정물적인 사진들에서는 기존의 회화적 요소를 가능한 배제하면서 즉물성을 최대한 살려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사진의 트리밍(찍고 난 후 사진속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 내는 것, 디지털 포토샾에서 크롭핑과 같은 기능)을 최소화하면서 플래밍(촬영할 때 이미 파인더 내에서 첨삭을 하여 화면 구성을 하는 것)을 통한 완벽한 구성을 만들어 냈다. 이 대목을 통해 정인성이 왜 평생 라이카(Leica) 카메라를 고집했는지 알 수 있다. 라이카는 35mm 카메라이면서도 사물이 가진 질감의 세부묘사가 가능했다. 때문에 신즉물주의를 표방하는 작업에서 라이카를 능가하는 카메라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당시 라이카 카메라 한 대 가격이 쌀 80가마.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가격이었을 만큼 고가품이었다. 그러나 라이카의 뛰어난 묘사력은 마니아들로 하여금 집 한 채 값을 지불하고도 아깝지 않다는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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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를 기점으로 국내사진의 조류는 여명기를 벗어나면서 전개기에 들어서게 된다. 이는 리얼리즘 사진미학의 전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즈음에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나선 ‘한국사진작가협회’가 탄생하게 된다. 생활주의 리얼리즘 이란 용어는 없다. 단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사진가들이 당시 시대상황(전후(戰後)폐허속에서의 인간 삶의 환경)을 주 소재로 촬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용어이다.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같은 회를 결성한 임응식과 함께 창립멤버로 간사를 맡아 활동한 정인성 선생은 1961년 군사정부 해산령에 의해 협회간판이 내려질 때까지 부산에서 활동을 주도했었다. 정인성의 생활주의 리얼리즘도 50년대를 넘어오면서 꽃을 피웠다. 전후(戰後)의 한국사회가 가진 여러 가지 문제나 현상들을 일체의 연출이나 과장됨 없이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당시의 시대상황이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운동의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 편 이때 한국사단이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것은 1952년 제1회 창립전에 출품한 사진들을 일괄적으로 모아 일본 아루스 국제사진살롱에 출품을 했는데, 정인성은 두 번째 출품 때인 1954년 일본 아사히신문 국제사진살롱에 두 작품이 입선을 했다.
    이외 정인성의 활동 경력을 보면 1938년 <여광사진구락부 회원전>을 시작으로 다양한 사진 활동을 해왔는데, 1939년에는 암뢰(岩瀨)사진재료점에서 개최된 <사진신보>의 예회(例會)에 출석하여 여러 차례 준특선에 오르기도 했다. 1939년에는 ‘부산부 사진구락부’를 발기했으며, 1948년 제2회 <향토예술사진 공모전>에서 특선, 1950년 <부산혁토전>에 초대되었다. 39년엔 <부산동인전>, 52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전>, 60년 <외국 당선작품 걸작사진전>, 1980년 <부산항 개항 100년 사진전>, 1983년 <한국현대사진 대표작전>, 94년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작품3점 수록, 1998년 <한국사진 역사전>에 작품 수록 등과 같이 그 경력은 다른 사람들과는 쉬 비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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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성은 후학을 키우는데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임응식이 1954년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한 것이 사진예술론 강좌의 시초였으며 정인성은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1957년부터 부산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부산대 윤인구 초대총장이 사진에 대한 선구적 관심을 가지고 사진예술론을 정규 커리큘럼에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65년부터는 한성여자초급대학에서, 66년부터는 동아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필자도 70년대 후반 선생의 사진예술론 강의를 들었다. 정인성의 명 강의는 대구까지 소문이 자자해서 당시 대구에서 유명했던 ‘월산사진학원’에 강사로 초청 받을 정도였다. 텃세가 세기로 소문난 대구 사진계가 외지인을 초청하여 강의를 맡겼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진미학에 대한 선생의 시각과 촬영에서 현상 인화까지 일련의 과정을 완벽하게 정리하는 선생의 강의방식은 그만큼 독창적이었다.
    입담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언급을 해보기로 하자. 선생의 재담은 정말 인기가 있었다. 강의를 할 때도 유머를 가미해 구수하게 풀어내는 덕분에 좌중은 압도당하기 마련이었다. 필자가 동아대학교에 재학하면서 선생의 강의를 들었던 1978년 당시 선생은 학교에서 제일 큰 강의실을 사용했으나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자리가 없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정인성의 사진 강의는 TV로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에 동양방송에서 장장 1년간이나 주1회 씩 50여 회의 사진예술론을 강의했는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요즈음의 시각으로 봐서도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단체를 지도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1959년 <전국대학생사진연구회> 고문, 1961년 <부산사진동우회> 회장, 1964년 <부산사진동우회> 회장, 1964년 <부산사진동인회> 회장, 1968년 <남광회> 명예회장, 1972년 <부산일요사진회> 지도고문, 1973년<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을 엮임 하면서 부산사진계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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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공모전 심사에서도 정인성의 업적을 엿볼 수 있다.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의 심사에 10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국전이 생기고 난 후 지역 작가로는 유일하게 심사에 참가함으로써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진계에 부산 사단의 세력을 확대시켰던 것이다. 그 외에도 제1회 전국예술사진현상공모전, 제1회 부산예술제사진초대작가전, 신인예술상, 한국국제사진살롱,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부산미술전람회 등 국내 중요한 공모전 심사위원의 자리엔 정인성은 꼭 자리를 했다.
    사진 공모전 심사와 관련해 정인성의 올곧은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인성의 자제분 중에 사진작가인 정영모가 있다. 정영모가 1972년 동아사진콘테스트에서 특선(당시 최고상)을 했을 때도 정인성은 아들의 작품에 대한 채점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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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성은 순수사진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평론가, 논설가, 교육자로서 부산사진사에 뿐만 아니라 한국 사진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셨다. 이중에서 이론적 논리의 완벽함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이미 한물간 픽토리얼리즘(회화주의사진, 살롱사진)을 추구하는 사진작가들에게 “그림같이 아름다운 사진이란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찬사가 아니라 사진의 자살을 의미하는, 즉 사진에 대한 모독과도 같은 것이다”라는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회화는 공백의 화폭위에 하나하나 작가의 구상을 표현 하는 것이고 사진은 자연과 사회에서 이미 완성된 이미지를 발견, 선택하는 것이다. 회화는 구상의 예술이라면, 사진은 발견의 예술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리얼리즘에 대한 나름의 주관과 같은 평면예술이지만 회화와의 차이를 나름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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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품 면에서도 원만해서 누구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애주가인데다 풍류를 아는 분이기에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후일에는 주례를 직업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말을 들을 만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일생을 풍류객으로 살면서 1930년대에는 만주, 러시아 등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나라를 돌며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 그리고 독서량도 엄청나 틈만 나면 책을 들고 있었다. 넓은 세상을 둘러본 경험과 독서를 통해 체득한 지식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나온 것은 물론이다. 그러한 정인성의 성품은 누구보다도 폭넓은 대인관계를 유지하게 했다. 특히 임응식과의 친분은 남달랐다. 나이가 비슷-정인성은 1911년생, 임응식은 1913년생-한데다 사진미학에 대한 철학이나 접근 방법도 맥을 같이했기에 두 사람의 교분은 친구 이상이었다. 그리고 평생 순수사진을 추구했고, 미술분야에까지 폭넓은 시각을 가지는 등 많은 부분에서 닮은 점이 있었다. 임응식은 전국 최초로, 정인성은 지방 최초로 대학에서 사진강의를 한 것도 닮은 점으로 꼽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이처럼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한국 사진계를 이끌어 나갔다.
    이렇게 풍유와 멋을 알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한 정인성이지만 그에게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으로 있을 때였다. 사진작가협회 이사장이 바뀌면서 사협 이사장을 역임한 사람만 고문으로 추대한다는 새로운 회칙으로 인해 고문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웬만하면 항의를 할 법도 한데 그는 미련 없이 사협을 탈퇴하고 야인의 길을 택했다. 후배들이 선생이 너무 쉽게 물러난 데 대해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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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성이 이루어 놓은 업적은 일일이 열거하기엔 너무 많다. 이렇듯 부산 사단(寫壇)은 물론 한국 사단(寫壇)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덜 알려져 왔다 그러나 2001년 필자가 사진가 김홍희와 공동으로 운영했던 부산최초의 사진전문 갤러리 ‘포토갤러리051’에서 유고사진가 정신성 사진전을 연적이 있다. 미 발표작을 포함하여 28여점을 전시했었다. 그리고 지난해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정인성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업적을 재조명하는 사진전을 얼었다. 그리고 작품과 여러 자료들을 함께 묶은 도록도 발행했다. 뒤늦게나마 정인성의 업적이나 작품이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정인성이 타계한지 올해로 16주기가 된다. 생전에 정인성은 “비록 발표되지 않는다고 해도 사진활동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호흡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며 1996년 타계하기 전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으셨다. 그러한 정인성의 열정적인 예술혼이 사진을 찍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문진우(2001) <예술부산 2001년 여름호 / 부산을 살다간 예술가 열전> (부산, 부산예총)
    강현덕(2012) <예술문화비평 2012 여름호 / 정인성 사진전-부산사진의 여명> (부산,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이미정(2012) <정인성 탄생100주년 기념사진집 / 정인성 사진전-부산사진의 여명>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이경민(2012) <부산 초기 사진사연구 / 일제강점기~1950년대를 중심으로>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세미나 자료집)
    눌원문화(2001) <눌원문화인 / 사각에 담은 세상> (부산, 눌원문화재단)


    <글 및 사진제공-문진우>
    문 진 우(文 鎭 優 / Moon, Jin Woo / 59년 부산생)
    □ 경력
    ○ 부산매일신문 사진부 데스크 역임
    ○ 포토갤러리 051 관장 역임
    □ 전시
    ○ 개인전
    - 1993년 :「불감시대」 (부산일보 전시실 / 부산) 사진집 발간
    - 2011년 :「하야리아 사진속에 잠들다 」(경성대학교 제1미술관 / 부산)
    포함 개인전 11회
    ○ 기획전
    - 1994년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전」 (인데코화랑 / 서울)
    - 1996년 :「한국 사진가연합(민사협) 대한민국 환경전」 (예술의 전당 / 서울)
    - 기타 단체전 수십회 참가
    □ 현재
    - 프리랜서 사진가 / 동아대학교출강 / 부산MBC ‘포토에세이 골목’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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