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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우

문화예술인 영상예술인 영화 감독

NO.AGD579최종업데이트:2012.10.15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프로필

이필우

  • 분류문화예술인
  • 이름이필우 / 李弼雨
  • 생년월일 1897년 11월 27일
  • 출생지 서울
  • 데뷔년도 1924년
  • 데뷔작품 장화홍련전

인물소개

  • "부산문화예술 전자아카이브" 2012년 10월의 인물스페셜


    한국영화기술의 개척자, 이필우

    김이석 (동의대 영화학과 교수)

    한국영화 기술의 개척자, 이필우(李弼雨, 1897~1978)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필우는 1920년 〈지기(知己)〉로 한국영화 최초의 촬영기사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으며, 1924년에는 최초로 한국인의 자본과 기술로 제작되고 한국의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 <장화홍련전>을 촬영하게 된다. 또 1935년에는 한국 최초의 유성영화 <춘향전>에서 촬영과 녹음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촬영과 녹음 외에도 이필우는 편집, 현상, 조명, 등 영화기술 전 분야에 걸쳐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영화 연출, 제작, 각본 등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한국영화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36년간 총 41편의 영화에 참여한 이필우는 1960년 부산에 정착한 이후에는 후학 양성과 기술 전수 등을 통해 부산영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 출생과 성장
    이필우는 1897년 11월 27일 서울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을지로 지역에서 시계방을 운영하던 이필우의 부친은 시계 외에도 환등기, 사진기 등 다양한 물품들을 함께 취급하였고, 그 덕분에 이필우는 어린 시절부터 영상 장비들에 친숙해질 수 있었다. 이필우의 동생 이명우(1901~?) 역시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관심을 보였는데, 형제는 1932년 우리나라 최초의 유성영화 <춘향전>을 함께 제작하는 등 형제 영화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 영화계 입문
    1913년, 열일곱이라는 이른 나이에 우미관에서 영사기사로 일하면서 영화 장비에 대한 기술을 익히기 시작한 이필우는 1916년 일본으로 건너 가 영화기술을 본격적으로 습득하기 시작한다. 오사카의 데이고쿠키네마의 촬영소에서 촬영 견습생으로 일하는 동안 어깨 너머로 영화기술을 익힌 이필우는 이후 시사실 기사로 일하면서 영사 기술 및 촬영 기술 등에 대해 지식을 쌓게 된다. 1919년, 고종황제의 장례식 장면을 촬영하면서 촬영기사로서 경력을 시작한 이필우는 1920년에는 문예단장 이기세의 제안에 따라 〈지기〉의 촬영을 맡게 되는데, 촬영, 현상, 스틸 사진 등을 담당한 이 영화를 통해 이필우는 스물 세 살의 나이에 한국 최초의 촬영기사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게 된다.

    ○ 영화계 입문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으로 귀국한 이필우는 1924년 <장화홍련전>을 촬영하게 된다. 일본인 하야가와가 제작한 〈춘향전〉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단성사 극장주 박승필이 제작한 이 영화에서 이필우는 촬영과 편집과 현상을 담당하였다. 1925년에는 이구영과 손잡고 고려영화사를 창립하고 〈쌍옥루〉를 제작하였으며, 1926년에는 이필우 자신이 제작, 각색, 감독, 촬영, 편집 현상 등 1인 6역을 담당한 영화 <멍텅구리>를 발표한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노수현의 다섯 컷 만화 『멍텅구리』를 영화화한 이 영화가 흥행과 비평에서 참패하면서 이필우는 크게 낙담하게 된다. 1927년에는 기생을 출현시켜 화제를 모은 〈낙양의 길〉을 발표하였으며, 같은 해 명월관 기생 ‘강명화’의 사랑과 죽음을 그린 〈홍련비련〉으로 다시 감독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영화 전 분야에 걸쳐 전 방위적인 활동을 펼치던 이필우는 이 무렵 나운규의 <아리랑> 시리즈를 두고 신문지상에서 서광제와 벌인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이필우가 단순한 영화기술자가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관점을 확고하게 구축한 영화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1935년 이필우는 다시 한 번 한국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을 세상에 공개한다. 동생 이명우가 연출을 담당하고 이필우 자신이 촬영과 녹음을 담당한 <춘향전>이 바로 그것인데, 이 영화는 한국 최초의 유성영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1927년, 세계영화사에 최초의 유성영화로 기록된 <재즈싱어>가 발표되면서 전 세계 영화인들이 유성영화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필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31년, 이필우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나운규를 만나 유성영화 제작에 대해 논의한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이필우는 직접 ‘바르보’카메라를 구입하고, 옛 동료인 나카가와와 더불어 독자적인 유성영화장비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 유행하던 디스크방식과는 다른 사운드필름방식의 녹음기술을 연구하기를 원했던 이필우는 20세기폭스사 뉴스팀이 촬영을 하고 있던 상해로 건너가 유성영화 연구 과정에서 부딪혔던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필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내가 상해로 건너가 서양토키장치를 염탐했죠. 특허품이라고 안보여주는 것을 중국인 관계자에게 10원을 주고 구워삶아 훔쳐보았지요.”
    나카가와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쯔시바시(土橋) 녹음 장치의 사용법과 P.K.R. 발성 장치 기술을 습득한 이필우는 1935년 <춘향전>을 발표한다. 이기세가 각본을, 이필우의 동생 이명우가 연출을, 이필우 자신은 촬영과 녹음, 현상, 조명 등 기술 분야 대부분을 담당한 이 영화는 1935년 10월 4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는데, 스크린 속의 배우가 한국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화제를 모으면서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이 영화가 선보인 새로운 영화 기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면서 이필우는 한국 영화계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인정받게 된다.

    ○ 해방 이후
    한국영화의 기술적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이필우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파 영화감독들이 세대교체를 주도하게 되면서 이필우의 활동 공간은 축소된다. 해방 직전에는 만주 지역으로 떠났던 이필우는 해방 직후 귀국하여 미공보원에서 영화기술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이필우는 북한군에 체포되고, 이 와중에 그의 동생이자 영화적 동료였던 이명우는 납북되고 만다. 종전 이후, 이필우는 안양촬영소 건립에 현장감독으로 참여하였으며, 촬영소 완공 이후에는 초대 촬영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 부산시절
    1960년, 이필우는 현역 생활을 청산하고 자녀들이 살고 있던 부산에 정착하게 된다. 부산 정착 이후, 이필우는 ‘부산예술학원’을 개설하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인다. 오랜 기간 영화현장에서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영화 기술과 한국영화사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였으며, 부산에서 제작되는 뉴스영화 등에도 관여하게 된다. 1964년에는 부산에서 활동하던 영화인들을 규합하여 한국영화인협회 부산지부를 창립하고 초대지부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필우의 부산 시기 활동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영화촬영소 건립 계획이다. 부산영화 연구자인 홍영철에 따르면 당시 이필우는 태종대에 영화 촬영소를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부산시장을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군부대 이전 문제 등으로 인해 당대에 실현되지 못했던 그의 계획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부산에 영화스튜디오 등이 건립되면서 뒤늦게나마 실현된다. 부산에 정착한 지 18년이 지난 1978년 10월 20일, 이필우는 여든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2000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는 이필우가 한국영화사에 남긴 탁월한 업적을 기리고자 ‘이필우 기념상’을 제정하였다. 매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시상식에서 수여되는 이 상의 수상자로는 정일성 촬영감독, 김동호 조명기사, 김 현 편집기사, 고 이성춘 촬영감독, 이경순 녹음기사 등이 있다.

    참고문헌
    김남석, <1930년대 ‘경성촬영소’의 역사적 변모 과정과 영화 제작 활동 연구>, 『인문과학연구』 33호.
    김수남, <나운규의 <아리랑 그 후의 이야기>에 대한 비평논쟁 고찰>, 『영상예술연구』 8호,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kofa.koreafilm.or.kr/
    홍영철, 『釜山映畵 100年』 , 한국영화자료원, 2001.
    -----, 『부산근대영화사』, 산지니, 2009.
    -----, <부산을 살다 간 예술가열전 54, 영화인 故 이필우 선생>, 2009.03.24.,, http://www.artpusan.or.kr/

    <글-김이석>
    동의대 영화학과 교수, 영화이론을 전공하였으며 현재 부산독립영화협회 대표,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와 사회』(공저),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공저) 등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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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장르

  • 장르 문화예술인 > 영상예술인 > 영화 > 감독
  • 역할 영화감독
  • 대상 일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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