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중반 김향촌, 이춘양, 이매방, 황무봉 등과 함께 부산에서 활동한 여성 신무용가로 대청동에 정착했다. 이 무렵 김춘방은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자유중국 대북, 금문도, 마조도 등에서 해외공연을 하였다. 1953년 환도와 더불어 많은 무용인들이 서울로 옮겨 가고 얼마 되지 않은 무용인들이 부산에 남았다. 환도 후 1954년부터는 재부 무용인들에 의한 활동이 계속되었고 유능한 신인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해에 김춘방은 연구소를 개설했다. 1955년 6월 김춘방무용발표회를 중앙극장에서 가졌고 <여인상> 등의 작품이 이 무대에 올랐다. 김춘방은 발표회 후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해외공연을 가져 크게 환영 받았다. 1957년 12월 강이문의 알선으로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무용인의 협동체인 부산무용가협회가 결성되고, 김춘방은 여기에 가입해 회원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1961년 영남극장에서 개최되었던 경남학생무용경연대회에서 강이문, 최희선 등과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남편은 부산의 중국영사관의 공무원이었고 두 아들이 있었다. 60년대에는 춤을 그만두고 동아대학교 등에서 불문학을 강의했다. 사설 도서관을 운영하기도 하고, 남편과 사별 후 서울에서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참고 문헌]
강이문, 「부산무용사」,『부산시사』제4권,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1.
「꿈만으로 사라진 무용가 김춘방」, 월간 『춤』1976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