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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덕수

문화예술인 전통예술인 전통예술 수영야류

NO.AGD678최종업데이트:2015.12.04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프로필

태덕수

인물소개

  • 1947~67년 부산시 공무원

    1965년 부친 태명준으로부터 수영야류 전수받기 시작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 43호 수영야류(수양반) 예능보유자 지정

    1994년 수영야류보존회장

    1999년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장

    부산문화대상(2001), 옥관문화훈장(2004), 부산시문화상(2006)



    <2012년 12월 인물스페셜>


    수영들놀음의 ‘수양반춤 태덕수’



    ○ 수영들놀음의 양반과장


    “쉬이-, 우리 양반의 집 자식으로 과거 때가 임박하였으니 과거갈 준비를 해야지 않겠나”
    청색관복에 사모각대(紗帽角帶)하고 사선(沙扇)을 든 점잖은 풍모의 수양반(首兩班)이 춤을 추다 말고 일행들에게 동의를 구한다. 같이 춤추던 네 양반이 한결같이 ‘암 그러기로 하세’ 찬성합의를 하는데 70대의 차양반은 홍안백발의 노인탈에 털모자를 쓰고 죽장에 긴 담뱃대를 들었으며, 셋째 양반은 30대의 인물인데 남색도포에 붉은 술띠를 띠고 부채를 들었다.
    넷째 양반은 코가 약간 비뚤어지고 언청이라 째보 양반인데 다홍빛 도포에 충정관(沖正冠) 쓰고 부채를 든 20대의 경박한 인물이며, 책방도령인 종가도령은 영리하나 경박해 보이는 탈을 쓰고 남색 쾌자(快子)를 걸치고 복건(㡤巾, 사내아이가 호사할 때 머리에 쓰는 관)을 썼다.
    수양반이 차양반에게 시문 짓기를 권한다.
    “자네가 노련하니 먼저 운자(韻字)를 떼어보시지?”
    차양반 “그럼, 뻑뻑할 응(應) 자가 어떠할꼬?”
    일동 “그거 좋지”
    수양반(셋째 양반에게) “다음은 자네가 내어보게”
    셋째 양반 “나는 엷을 박(薄) 자라로세”
    일동 “그거 좋겄다”
    수양반 “뻑뻑할 응, 엷을 박, 응박 응박”
    운자를 떼고 나니 기분이 좋아진 다섯 양반들이 응박 응박 거리면서 한바탕 굿거리 장단으로 놀다가 수양반 다시 “쉬-”하며 춤을 그치게 하고
    “과거를 가려면 옛날 선조대감부터 부리던 하인 막득이를 다리고 감이 어떨꼬?”
    바야흐로 대대로 집안에서 심부름 노릇이나 하던 막득이(말뚝이)를 데리고 나설 차비를 한다.



    ○ 태덕수의 수양반춤이 단연 돋보이고


    수영들놀음 양반과장이 질펀하게 펼쳐지는 수영공원 놀이마당에 사모관대에 관복입은 수양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양반다운 풍모를 지닌 점잖은 기품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잔뜩 무게가 실린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 부드럽게 춤을 춘다. 춤을 추는 태덕수 선생의 춤속에는 장대(壯大)함 마저 녹아 있다.

    양팔을 펴들고 우쭐거리다가 오른발을 번쩍 들어 90도로 꺾어 옮기면서 들어 올린 양팔을 자연스럽게 좌우로 감아 돌린다. 다시 평사위로 돌아오면 춤은 배김사위로 변한다. 양팔로 허벅지를 탁 치고 가볍게 뛰어 오르면서 왼발을 왼쪽으로 돌려 찍으며 양팔을 폈다가 오른발을 들면서 왼팔은 왼어깨에 얹는다.
    들었던 오른발을 비스듬히 땅을 옮기며 배긴다. 외팔배김사위도 곁들이면서 멋진 허튼춤을 풀어낸다.

    춤선생에게서 배운 춤이 아니다. 아버지(태명준) 춤태를 어깨너머로 배운 춤이다. 꽹과리가 굿거리를 홑박으로 치면 춤도 멋지게 배김사위를 엮어낸다. 배김이 강한 수영춤의 특징이다. 논 매고 밭 갈며 때로는 어망들고 고기잡이하는 등 두렛일을 할 때면 풍물을 앞세워 흥을 도우던 수영사람들의 순박한 정서가 이들이 치는 꽹과리 장단에도 묻어난다.
    북문밖 농청과 남문밖 농청이 있어 농삿일을 관장하던 시절 수영농청(水營農廳) 산하에 내방청(內房廳)과 모기청(模技廳)까지 두어 부녀자들과 15,6세 소년농청원에게까지 농사 흥을 도우는 데는 풍물패가 으뜸이었다.
    좌수영(左水營) 시절 군(軍), 민(民)이 상조하였던 어방(漁坊)일에도 풍물패가 있어 힘든 일의 고됨을 덜어 주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울려대던 수영풍물 가락은 소박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느리고 단조롭기까지 한 가락이지만 농청사람들과 어방사람들이 신명을 도우는 데는 잘 다듬어진 가락보다 안성마춤이었다. 수영 굿거리 장단에 어울리던 허튼춤이야말로 이들이 논 메고 밭 갈며 어장일할 때 신이나서 추던 춤이었다.
    태덕수 선생의 수양반춤은 그렇게 다듬어진 춤인 것이다.



    ○ 태덕수(太德守, 1926년 생)


    태덕수 선생은 소시 적 아버지 사업따라 보수동으로, 함경북도로 옮겨 다닌 외에 지금껏 수영구 수영동 506-6번지에 살고 있다. 벌써 7대째이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안리로 망미동으로 수영동으로 동 이름만 바뀌었지 삶터는 예 그대로이다. 17살의 나이로 부산시 수영출장소(지금의 수영구청 전신)의 임시직을 시작으로 40세가 될 때까지 공무원으로 봉급으로는 자녀 학비 충당에도 빠듯한 형편인데다 친구와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고지식 태덕수 선생의 봉급봉투는 항상 얇을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부인이 포구나무식당을 운영하며 살림을 떠 맡았다.
    1969년 공직을 사직하고 부친의 권고로 수영민속보존회의 무보수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민속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춤 스승은 부친 태명준(太明俊, 1906~1979) 어른이다.
    매섭게 몰아치는 아버지의 특강(?)은 밥상머리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곁에 장성한 손주들이 듣고 있어도 나무람은 인정사정 두지 않았다. 부친은 길흉사의 의례와 의상 등 전통과 민속에 밝은 큰 어른이셨다. 장의사가 없었던 시절 꽃수의를 만든 손재주꾼이었고 동네 풍물단을 조직하여 지신밟고 달집태우기를 주관하였다. 풍물패를 소집하고 보존회원들을 소집할 때면 이른 새벽부터 자전거를 타고 회원댁을 일일이 방문하여 통지하고 약속을 받아 내는 극성파(?) 꾼이었다. 할아버지(太斗文) 장구솜씨를 이어받아 수영 특유의 가락으로 놀이판을 휩쓸고 다니는 등 식사하다가도 풍물소리만 나면 밥숟가락 던지고 뛰쳐 나가던 소문난 수영 한량이었다.

    벌써 50년 가까이 민속이 좋아 민속과 더불어 사는 태덕수 선생도 부친의 모습을 닮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어서 명예보유자로 신청하기 전까지만해도 오전 10시면 어김없이 보존회에 출근하여 전수생들을 독려하고 궂은 일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래 전부터 익혀 온 붓글씨 솜씨가 서도의 경지에 이른다. 필자를 위해 담묵으로 일필휘지(一筆揮之)한 ‘藝道’ 두 글자가 살아서 또아리를 틀며 운기 생동한다. 평소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이 활달한 글 속에 묻혀 버린다.
    흔히들 민속을 보존전승하는 일에 열화같이 나타나는 외통수 고집스러움을 태덕수 선생의 모습이라 지레 짐작하고 말 붙이기도 어렵게 생각하지만 이렇듯 붓을 든 선생의 모습은 절제 속에서의 자상하고 따사로움이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속내를 드러낸다.
    장남 한영(漢榮, 1954년 생)은 소년티를 벗으면서 아버지의 민속지킴이에 두 팔 걷고 나섰다.
    고등학교 영어교사에 걸맞지 않게(?) 우리 소리와 춤이 좋았다. 체구가 훤칠하여야 태가 나는 수양반 역은 마음뿐이지만 윤수만-도태일 선생에게서 꽹과리를 익히고, 들놀음 할미역 엉덩이춤에 신바람을 낸다. 근무하는 성지고등학교를 수영들놀음 전수학교로 지정하여 민속반을 지도한 지도 벌써 23년이 되었다. 1997년에는 성지고 민속반이 전국청소년민속경연대회(익산)에서 명예의 대통령상을 수성하기도 하는 등 학교에서는 오히려 민속선생님으로 통한다.
    둘째 지영(志榮, 1961년 생)은 어머니 식당을 이어받아 경영하면서 민속조보존회 일에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특히 손녀 현지(賢智, 2남 지영의 딸)이 꽹과리를 배워 초등학교 때 수영들놀음 상쇠를 맡았고 중학교에 진학하여서는 좌수영어방놀이 상쇠를 맡는 등 민속재동이었으나 대학에 진학한 후 뜸한 것이 섭섭하단다.



    ○ 수영들놀음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네 과장


    수영들놀음은 탈을 쓴 광대들이 민속악(풍물)에 맞추어 춤추면서 이야기를 펼쳐가는 연극적인 놀음인 탈놀음(假面劇)으로 수영지방에 전승되어 오는 민속놀이를 일컫는다.

    흔히들 200여 년 전 합천 밤마리 광대패들이 수영장에 와서 연희하던 모습을 수영사람들이 보고 익혀서 만든 것이라고 전승과정을 정리하고 있지만, 전문예인 집단들의 탈놀음을 겨우 몇 번 보고 수영탈놀음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더욱이 이들은 당시 하천민으로 자처하던 이들이 아니던가, 오히려 순박한 수영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서로 모여 소박하게 연희되어 오던 탈놀음꾼들이 어느날 이들의 집단 탈놀음을 봄으로써 놀이에 형식과 재미를 더하게 되었다고 보는 민속학자 정상박 박사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컴퓨터 게임을 비롯한 놀이가 많은 요즈음과는 달리 옛날에는 마땅한 놀이가 없었다. 흔히들 세시풍습이라는 것도 1년 중 정월에 모여 있게 마련이고 정월 중에도 상원(上院)에 이루어지는 풍속이 많았다.
    이들 풍속 중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날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농·풍어를 위해 마을당산에 제사지냈으며 탈을 만들어 쓰고 연희하므로 서로를 축복하고 즐겨었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대동놀이였다.

    수영사람들도 상원날(음력 정월보름) 아침 마을식수의 원천인 먼물샘에 고사(告祀)하고 최영 장군 묘제도 지내면서 좌수영(오늘날의 해군기지) 고을의 안녕을 빌었고, 그 날(보름날) 밤에 탈놀음을 놀았다. 마을의 손재주꾼이 만든 탈을 쓰고 배역을 서로 정하여 횃불을 밝혀 즐겁게 놀았다.

    횃불이 만드는 불그림자가 탈을 우습게도 만들고 무섭게 보이기도 하였으며 슬프디 슬픈 모습을 띠게도 만들었다. 올해도 탈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탈놀음으로 승화시켰다. 멀리 마을 어귀에서부터 시장터 놀이마당에까지 (지금은 민속보존회 놀이마당까지) 풍악을 잡히고 연희자들을 앞세워 길놀이부터 시작하였다. 청사초롱과 화려한 연등을 든 마을사람들은 연희패거리들이 부르는 난봉가, 양산도가에 맞추어 흥을 도우며 놀이마당에 들어선다.

    수영들놀음은 양반·영노·할미 영감·사자춤 등 모두 4과장으로 짜여져 있다.

    제1과장은 ‘양반과장’으로 오광대와 하인 막득이의 놀이판이다. 50대 수양반과 70대 차양반, 30대 셋째 양반, 20대의 넷째 양반, 그리고 종가도령이 굿거리 장단으로 한바탕 판을 벌리고 어우러지고 백구타령과 오독도기타령도 합창하면서 좌중의 흥을 돋운다. 몇 차례 독촉 끝에 불리어 나온 막득이는 인사 올리라는 다섯 양반에게
    “일 원산, 이 강경, 삼 파주, 사 마산, 오 삼랑, 육 물금, 칠 남창, 팔 부산을 두루시 찾아도 서방님은 커녕 새 아들 놈도 없습디다”
    하고 한결같이 생긴 모습은 훤하나 제대로 인격을 갖춘 선비가 팔도강산에 없음을 빗대어 독설을 내갈긴다. 막득이의 해학찬 나무람과 뼈다귀 있는 조롱에 기가 질려버린 양반들은 갈가부타령을 부르면서 퇴장하고 제2과장 ‘영노과장’으로 이어진다.
    반인반수의 괴물 영노에게 조롱을 당하면서도 살아보겠다고 아웅거리는 수양반의 비굴함이 과장 속에 깔려 있다. 제3과장은 ‘할미영감과장’이다. 이 과장은 전국의 여러 탈놀음과장들에서도 유사함이 보이는 과장으로 더러 내용이 첨삭되기도 하지만 할미와 제대각시(둘째 부인) 사이에 일어나는 애정갈등과 당시 서민생활의 궁핍상을 표현하는 내용은 대동소이한 과장이다.
    화가 난 영감의 발길에 차여 실신 졸도한 할미가 급기야 죽고 상여꾼들은 할미를 운구하면서 염불가와 상여소리를 부르면서 퇴장한다. 마지막 제4과장은 ‘사자춤과장’으로 수영의 풍수를 놀이에 대입하는 특이한 경우이다. 수영 앞산 백산(白山)의 형상을 사자로 이해하고 산신인 사자가 고을을 등지고 바다로 뛰어드는 형국이어서 산신을 위로하기 위해 범을 제수로 치제(致祭)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잡귀 잡신을 쫓아 버리는 능력을 가진 사자의 위력이 돋보이는, 사자를 곁들인 벽사진경의식무는 수영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의 발로라 여겨져 더욱 소중한 민속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4과장은 풍수와 주술적인 고을지킴이가 사자춤과장에서 놀이와 춤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탈놀음이 끝나면 구경꾼들도 놀이마당에 들어와 탈꾼들과 어울려 한바탕 뒷풀이를 즐긴다. 그리고 춤추던 탈을 태우며 고사를 올리는 탈소각제를 올린다. 무사히 탈놀음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고을의 태평과 풍요를 기원하였고 각 가정의 행복을 빌며 절을 하면서 수영탈놀음 전과정을 끝맺는다.



    ○ 해방 후의 수영들놀음 복원


    일제강점기 한국의 모든 민속놀이는 일본의 조선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철저히 봉쇄 당하고 만다. 꽹과리와 징 등 소리 울림이 큰 악기들을 징발 당하고 풍물을 치며 노는 것 조차 금지하였다.
    구경꾼들이 모이면 독립운동할 것이란 일본 경찰의 감시 눈초리가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우리 민속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서둘러 그간 잊혀졌던 민속을 찾아내었다. 소리와 춤과 예능을 기억하고 있는 원로들을 모시고 이들의 증언과 구술을 근거로 잊혀졌던 민속을 복원하였다.
    수영들놀음도 태덕수 선생의 부친(태명준)에 의해서 복원된다. 함경도에서 사업을 하던 부친이 1946년 솔가 월남하여 수영초등학교에서 수영들놀음을 재현하였다. 1935년 일본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중단되었던 들놀음을 복원하자는 어른들의 의견을 좇아 연희자를 모으고 배역을 정하였다.
    최한복(崔漢福)이 수양반을 맡고, 강덕수(姜德守)는 차양반을, 셋째 양반엔 이차하(李次夏), 종가도령은 박인로(朴仁路), 할미역 박상도(朴庠道), 말뚝이는 조두영(趙斗榮), 상쇠 안명룡(安明龍) 제씨들이 맡고 장고는 태명준 씨가 맡았다. 동네사람들도 떡이며 단술이랑 해서 날랐다. 그리고 팔도시장 놀이마당에서 질펀하니 판을 벌였다.
    이를 바탕으로 최한복, 조두영 씨 등 뛰어난 꾼·쟁이들이 대사(사설)를 정리하고 옛 모습의 탈을 만들므로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제43호)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이를 위해 부친은 즐겨들던 술도 끊고 복덕방에서 얻어지는 수입을 모두 수영들놀음 복원에 쏟아 부었다. 수영민속의 제자리 찾기 위한 일에 혼신을 다했었다.


    < 참고문헌 >
    •「수영전통문화재」 ((사)수영민속고적예술보존회, 1997)
    •정상박, 「수영야류」 (화산문화, 2001)
    •태희완, 「탈춤」 (대원사, 1992)
    •주경업, 「부산의 꾼·쟁이들」(부산민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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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화가, 부산민학회장이며 1961년부터 23년 간 중등학교 미술교사 및 연구사를 역임하였으며 1983년 사직. 전업화가 선언하였다. 그림 소재를 전통정신에서 찾기 위하여 부산·경남을 비롯한 전국의 민속을 조사 연구하며 춤, 소리, 굿을 찾아 기록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간 유화 개인전 3회, 12회의 드로잉 개인전을 열었다. 「부산을 배웁시다」 1·2·3권을 비롯하여 부산과 관련한 11권의 도서를 집필 간행하였다.

주요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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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활동사항 - 년도, 활동내역,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년도 활동내역 비고
2014 별세  
2012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류 명예보유자 인정  
2009 11.20. 풍류한마당 수영야류 출연(민속극장풍류-한국문화보호재단주최)  
2006 제35회 부산시 문화예술부문 문화상 수상  
2004 10.20 대한민국 옥관 문화훈장 서훈  
2001 제2회 mbc 문화대상 문화예술부문 수상  
1999 -2003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제11대 이사장 역임  
1998 12.01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 수상  
1994 -2000 수영야류보존회장  
1989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류 수양반 예능보유자 인정  
1986 (사)수영고적민속보존회 상임감사 위촉  
1980 -매년. 대학 및 전통예술연구회 수영야류 전수교육 참여  
1979 10.25-27 제2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수영야류 공연(대구실내체육관)  
1976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류 이수자 선정  
1974 -1967 부산직할시 지방공무원  
1972 (사)수영고적민속보존회 사무국장 역임  
1969 05.01 (사)수영고적민속보존회 입회  
1965 부친 태명준으로부터 수영야류 전수받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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