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아카이브

HOME 예술아카이브 기본DB

해당메뉴 명

메뉴 열기닫기 버튼

기본DB

김규태

문화예술인 문학예술인 시/시조

NO.AGD68최종업데이트:2019.02.16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프로필

김규태

  • 분류문화예술인
  • 이름김규태 / 金圭泰
  • 생년월일 1934년 3월 26일
  • 사망일 2016년 5월 12일
  • 출생지 대구

인물소개

  • "부산문화예술 전자아카이브" 2012년 7월의 인물스페셜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참 곤란해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광복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고향인 부산으로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부산사람입니다.”
    시인으로 또 언론인으로 오랜 세월 부산을 지켜온 김규태 시인은 유소년시절과 대학시절을 빼고는 부산을 떠나본 적이 없는 부산사람이다.
    김 시인은 1934년 대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금호강변이 가까이 있었다. 시인의 어린 시절 추억이 흐르는 곳이다. 한여름 금호강변의 과수원탱자나무 울타리와, 사과 서리를 해서 강변 모래밭에 파묻어놓고 물놀이를 하다 나와서 사과를 먹곤 하던 기억이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친인척조차 없지만, 여름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눈부시던 금호강변은 시인에게 또 하나의 고향이다.
    칠성초등학교 5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함께 살고 있던 외삼촌이 징용을 가게 되어 동네사람들이 송별연을 하러 집에 와 있었다. 송별연에 모인 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중대방송이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기에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정오에 전쟁의 종언과 패전을 알리는 떨리는 일본천황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방송이 끝나자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한 젊은이를 보내는 이별의 날이 환희와 광복으로 바뀐 날이었다. 시인은 이 날을 평생 잊지 못할 날이라고 말했다. 우리말을 못 쓰고, 우리 역사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날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 해 9월, 시인의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부산 금정구 부곡동으로 이주했다. 부곡동은 안동김씨의 오랜 세거지로, 시인의 가족은 마침내 진짜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내성국민학교를 졸업한 시인은 6년제인 동래중학교에 입학했다. 시인은 중학생 시절에 문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책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시와 소설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책을 많이 사 주셨죠. 그 당시 동래시장에 서점이 세 군데 있었는데, 옥샘서점이 제 단골서점이었습니다. 그 때 출간된 시집과 단편집을 읽으며 밤을 새운 날도 많았어요.”
    소년 김규태는 바이런, 괴테, 베를렌느 시집을 읽으며 황홀해했다. <지용시선>, <청록집>. 정지용의 <백록담>, 유치환의 <청령일기> <생명의 서> <울릉도>를 이 때 만났다. 김동리의 <황토기> <무녀도>, 이태준의 단편집 <복덕방>, 이기영의 장편 <고향>, 이효석의 단편집도 읽었다. 김기림의 <시론>도 정독했다.
    “새 책이 나왔는지 궁금해 거의 매일 서점에 들렀어요. 한번은 학교에 낼 월사금으로 책을 샀던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어려워도 책값은 주니까, 아버지를 믿고 그랬겠죠.”
    월사금으로 책을 살 만큼 문학에 깊이 몰입했던 김 시인은 중학교 때부터 문예부에 들어 시를 썼다. 2학년 때는 <주간 서울>에 시를 투고했는데, 정말 잡지에 시가 실렸다. 「슬픔이 가로 놓여」라는 시였는데, 최초로 활자화 된 작품이라 아직도 시인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다.
    “겨울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수직이라는 것은 피해갈 수 있지만, 내 앞에 무언가 가로로 놓여 있으면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표현한 시입니다”라고 시인은 잠시 옛 추억을 더듬었다.
    이 일은 중학교 2학년 김규태를 단번에 스타로 만들었다.
    “국어교사가 박차갑 선생님이셨는데, <주간 서울>을 수업 시간에 들고 와서 ‘우리 동래중학교에 이렇게 글 잘 쓰는 학생이 있다’고 말씀하셨죠. 선생님이 전 학급을 다니면서 이야기하시는 바람에 동래여고 학생들까지 알게 되는 유명인이 된 겁니다. 그때 좀 우쭐댔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그런 경험을 너무 빨리 겪은 것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싶습니다.” 시인은 우쭐대며 잠시나마 우월감에 빠졌던 중학 시절을 좀 겸연쩍어 했다.
    중학 4학년 때 학년제가 개편됐다. 부산고와 경남고 등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지만, 시인은 동래고에 남았다. 시인은 “이북에는 오산고보, 이남에는 동래고보가 항일 독립운동의 근원이라는 역사적 자부심이 있었죠. 전 동래고를 끝까지 지켰습니다”라며 웃었다.
    동래고 시절, 시인은 운동을 좋아해 운동부에도 들었다. 동래고는 축구가 교기였고, 학생들 사이에 축구부 인기도 높았다. 시인은 축구도 해보고, 배구도 하고, 복싱도 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질 않았어요. 결국 다시 책으로 돌아왔지요”라는 시인의 말을 들으니, 문학이 시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시인은 우리 고전문학을 모두 찾아 읽었고, 시조를 300수 넘게 외웠다. 중고등학교때 우리 문학을 두루 읽었던 것이다.
    시인은 동래고 문예부장을 맡으면서 부산고 경남고 경남여고 동래여고 문예부장들과의 모임을 주도했다. 각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학생문사들은 빵집에서 만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하고, 동인집을 발간하는 의논을 했다. 문학은 언어의 예술이니까 책을 펴내고 싶었다. 그러나 고등학생의 처지라 돈도 없었고, 대학입시 준비도 하느라 동인집 발간은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모임에 함께 참여했던 친구들은 모두 서울대에 진학했다. 시인도 동래고를 졸업한 뒤 1953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시인은 “그 당시 상징주의 시 이론에 반해있었습니다. 국문학이 아니라 불문학을 선택한 이유는 나의 문학수업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라며 불문학과로 입학한 까닭을 설명했다.
    시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동대문 시장의 고서점가를 찾았다. 폴 발레리, 말라르메, 도스토예프스키 등 외국문학 서적을 탐독했다. 당시에는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된 책이 없어, 일본어로 번역된 책을 읽어야 했다. 원서를 직접 수입해 판매하는 전문서점도 숱하게 찾아갔다. 책을 한 번 주문하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려 책을 구해서, 포장을 뜯어내고 책을 펼칠 때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이었지요.” 시인은 원서를 구해 문학서적을 읽던 대학시절을 그리워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문우들과 함께 ‘문리대문학회’를 창립하고, 대학 당국을 졸라 <문학>이라는 책을 창간하기도 했다. 불문과의 이일, 이영우, 박맹호, 김규태, 국문과의 이어령, 문병욱, 영문과의 성찬경, 이태주, 독문과의 이상일, 이영구 등이 <문학>이 집필자로 참여했다. 광복 이후 최초 대학문학운동이었다.
    시인의 문단 등단은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박성룡 시인이 시인의 하숙집에 들렸다가 시 원고들을 보고는 “이 아까운 시들을 그냥 두지 말고 <문학예술>에 보내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당시 <문학예술>은 박남수, 이한직, 조지훈 세 명의 시인 합의제로 신인을 추천하는 시스템이었다.
    <문학예술> 1957년 8월호에서 시인은 「기(旗)」라는 작품으로 첫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문학예술>은 운영난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박남수 시인은 청년 시인 김규태를 잊지 않았다. <사상계>로 옮겨 일하던 박남수 시인은 <사상계> 12월호에 시인의 시 「아직은 잊지 않을 것이다」와 「잃어진 것을 위하여」 2편을 추천해, 3회 추천을 완료했다.
    시인은 등단했을 무렵 서울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당시 한국 전쟁의 무지와 참담함, 그 비극의 흔적이 서울 여기저기에 역력히 남아 있었습니다. 젊은 시인과 작가들은 폐허 위에서 갓 피어난 명동 등의 주점에서 허탈감을 달래곤 했습니다. 이 때 자주 어울려 술추렴을 하던 문인들이 김관식, 전봉래, 박성룡, 송기동 천상병, 이호철, 고은, 서림환, 오상원, 이현우 신기선, 이규헌 등이었습니다.”
    20대 시절, 시인은 시가 삶의 바람막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사는 동안 선택의 불가피성을 가르쳐주었고, 삶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기도 했지요.” 시는 시인이 기꺼이 선택한 작은 종교이기도 했다. “그것이 삶의 절망을 구원해주지는 않지만, 시 정신 속에 구원과 삶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시를 사랑했고, 시를 썼다.
    대학 졸업 후에는 취직 때문에 잠깐 고민을 했다. 그때에도 대학 문과 졸업생들이 취직을 할 곳이 만만치 않았던 가 보다. 병역이 해결됐다면 교직, 또는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일간지, 주간지를 막론하고 신문 잡지사, 출판사 쪽으로 취업할 수 있었다.
    시인은 1958년에 부산으로 낙향해, <민주신보>에 입사 언론인으로서 첫발을 디뎠다. 3년 뒤에 <국제신문>에 특채되었다. 국제신문에서 문화부장을 오랫동안 역임하고, 이어 사회부장, 정경부장 등을 지냈다. 1980년에는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신군부의 등장으로 언론 통폐합 때 <국제신문>이 <부산일보>에 통폐합됐다.
    시인이 부산일보에서 논설위원과 논설주간으로 활동하던 중, 1989년 2월 <국제신문>이 복간했다. <국제신문>으로 돌아온 시인은 논설주간과 논설고문으로 일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4년간 매주 연재했던 ‘김규태 칼럼’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칼럼으로 기억되고 있다. 국제신문사사편찬위원장직을 맡아 『국제신문 50년사』를 펴내어 전국 주요일간지로서 <국제신문>의 역사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인은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심경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언론계에 평생을 종사하게 된 것은 나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며 결코 후회는 없다”고. “그러나 다만 사회를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노릇이 아니며, 때로는 자신의 모든 기득권과 자산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각오 없인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라는 시인의 말은, 이 사회에서 언론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웅변해주는 듯 하다.
    언론인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시 창작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1958년 12월에 시인 서림환, 강상구 등과 종합문예지 <신군(新群)상(像)>을 창간했다. 부산 최초의 종합문예지였다. 1962년 1월에 동인지 <시기(詩旗)>를 손경하, 최계락 등과 함께 주재하여 발간했다. 1965년 5월에 동인지 <신어(新語)>를 박재호 등과 함께 주재하여 발간하기도 했다. 시인의 시 창작 활동 자체가 부산 문학의 토대를 일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1964년에는 ‘현대시동인’으로 참여했다. 오탁번, 허만하, 이유경, 주문돈, 이수익, 박의상, 김영태, 이승훈, 정진규 등과 함께 동인활동을 하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첫 시집 『철제 장난감』(삼애사, 1969)이 출간됐다. 『졸고 있는신(神)』(열음사, 1985), 『들개의 노래』(빛남사, 1993), 『흙의 살들』(아침나라, 2005) 까지 네 권의 시집을 냈다. 많은 시집을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독자로서 시인의 시집을 읽는 것은, 천천히 걸어가지만 확실한 족적을 남긴 한 사람의 길을 보는 지켜보는 감동을 준다.
    시인은 문학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칫하면 본질을 잃고 허식에 사로 잡혀 허덕일 때가 있다. 그 알량한 명예를 얻기 위하여 전혀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다툼을 하는 모습들은 우리에게 슬픔을 가져다준다. 자기 자신의 작품 하나 변변히 창작하지 못하면서, 웬 감투놀음에 정신이 빠져있는지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준다. 문학 판이 아무리 속물화 된지 오래라고 하나 본질을 떠난 어떤 명분의 행위도 의미가 없다.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진정한 예술인의 진지한 모습들을 보고 싶다”고.
    시인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부산에서 살았고, 대학시절 말고는 다른 고장으로 이동한 적이 없다. “부산의 자연은 차츰 나의 정신 안에서 위안의 공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라는 시인의 말에 부산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겨있는 듯하다.
    시인은 부산문화재단에도 당부의 말을 남겼다. “부산 문화재단이 발족한지 역사는 짧지만, 무엇이 부산문화와 부산 예술인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인지 중지를 더 많이 모아주기 바랍니다. 창작 에너지를 북돋워주는 역할을 해주길 당부 드립니다.”


    <김규태 시인 연보>
    -1934년 3월 26일(음) 대구 칠성동에서 태어남
    -1945년 8월 칠성국민학교 5학년 때 광복을 맞아 선친의 고향인 부산 부곡동으로 이주
    -1947년 3월 동래 내성국민학교 졸업
    -1947년 3월 동래중학교 입학
    -1953년 3월 동래고등학교 졸업
    -1953년 3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문학과 입학
    -1956년 7월 문리대문학회를 창립멤버로 <문학> 창간
    -1957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문학과 졸업
    -1957년 8월 <문학예술>지에 시 「기(旗)」가 추천됨. (이한직, 박남수, 조지훈 추천합의제)
    -1958년 2월 민주신보사 입사
    -1958년 12월 1일 부산 초유의 종합문예지 <신군상>창간호 발간, 편집:주간 김규태, 편집위원: 서림환, 강상구
    -1962년 5월 국제신문사 특채로 입사
    -1959년 12월 <사상계>에 「아직은 잊지 않을 것이다」와 「잃어진 것을 위하여」 두 편이 박남수 추천으로 천료됨
    -1962년 1월 시동인지 <시기(詩旗)>창간 (편집위원 김규태, 최계락 등)
    -1964년 시동인 <현대시>참여. (동인: 허만하, 주문돈, 이유경, 이승훈, 박의상, 이수익, 정진규, 김영태, 마종하, 오세영, 김종해)
    -1965년 5월 시동인지 <신어(新語)> 창간 주재
    -1969년 첫 시집 『철제장난감』(삼애사) 발간
    -1969년 민간 자연보호단체인 낙동강보존회 창립이사, 동보존회 낙동강보존 선언문 집필
    -1970년 2월 16일 국제신문 문화부장
    -1970년 제1회 가톨릭홍보상 수상
    -1973년 1월4일 국제신문 사회부장, 1977년 3월1일 문화부장, 1978년3월1일 정경부장,
    -1977년 <부산시문화상> 수상 (문학부문)
    -1979년 국제신문 문화부장
    -1980년 2월 1일 국제신문 논설위원
    -1980년 12월 1일 부산일보 논설위원(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부산일보로 강제이직)
    -1985년 시집 『졸고 있는신(神)』(열음사) 발간
    -1988년 7월 30일 부산일보 논설주간
    -1989년 부산시 문예진흥위원
    -1990년 7월 1일 국제신문 이사대우 논설주간
    -1993년 시집 『들개의 노래』(빛남사) 발간
    -1993년 <요산문학상> 수상
    -1995년 4월 27일 국제신문 논설고문
    -1996년 5월 국제신문 50년사 편찬 주간겸 논설고문(99년3월까지)
    -1999년 10월 5일 ‘김규태칼럼’을 국제신문에 매주 화요일자 연재
    -2003년 2월 10일자 ‘김규태칼럼’ 종료
    -2003년 9월 (사) 최계락문학상재단 이사장 취임
    -2005년 네 번째 시집 『흙의 살들』(아침나라) 발간
    -2012년 (사)최계락문학상재단 이사장(현)

    <글-박현주>
    몇 년전 문을 닫은 동보서적에서 월간서평지 <책소식> 편집장으로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일했다. 부산의 언론매체에 책 관련 칼럼과 기사를 쓰고, 라디오방송에서 책소식을 전하고 있다. 현재 부산일보 자매지 김해뉴스 취재보도팀 차장으로 근무 중이다.

    <사진-박정훈>
    부산의 여러 축제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영도문화원 등에서 사진 강의를 하고있다.

학력사항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내용(표)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학력사항 - 학습기간, 학교, 전공, 학위,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학습기간 학교 전공 학위 비고
동래고교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과

주요활동사항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내용(표)을 보실 수 있습니다.

주요활동사항 - 년도, 활동내역,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년도 활동내역 비고
1934년 대구에서 태어나 해방과 더불어 선친의 고향인 부산 금정구 부곡동으로 이주,

동래고교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졸업

1957년 "문학예술"지에 시 " 旗"로 추천받고 59년 "사상계"지에 신인 작품 "아직은 잊지 않을 것이다" "잃어진 것을 위하여"로 등단,

1964년 "현대시"동인으로 참여하여 허만하,이유경,주문돈, 김영태,정진규,이승훈 박의상,이수익,김종해, 마종하,오세영등과 작품 활동,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자문위원을 맡는다.

1962년 국제신보에서 문화부장, 정경부장, 사회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을 지내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국제신문 폐간으로 부산일보로 통폐합되어 부산일보 논설위원, 논설 주간, 부산일보 사사 편찬위원을 거친다.

1990년 국제신문 복간으로 다시 국제신문으로 돌아와 논설주간, 논설 고문으로 "김규태칼럼"을 4년여 집필하다.

1996년 "국제신문 50년사" 편찬주간을 맡아 "국제신문 50년사"를 발간, 이후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을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하다.

시집 "철제 장난감" "졸고 있는 神""들개의 노래""흙의 살들"등

부산시 문화상, 요산문학상등 수상. 부산시인협회 고문, 최계락문학재단 이사장(현)
 

해당장르

  • 장르 문화예술인 > 문학예술인 > 시/시조
  • 역할 시/시조인
  • 대상 일반인
  • 키워드 시#시인#논설위원#논설주간

주요작품

교육활동

    등록된 교육활동이 없습니다.
자료등록:(재)부산문화재단 -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