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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야류 들늘음 길놀이 행렬순도

문화예술작품 기타 기타

NO.APD7387최종업데이트:2015.11.26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프로필

  • 제·작자 천재동 [동래야류]
  • 작품제목 동래야류 들늘음 길놀이 행렬순도
  • 작품장르 문화예술작품 > 기타 > 기타
  • 발표매체 그림
  • 발표주체 3

작품설명

  • 신우언 선생과 천재동 선생으로부터 고증을 받아 1972년 7월 12일에 완성된『동래야류 들늘음 길놀이 행렬순도』이다.
    현재 동래문화원,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본가 및 4호선 동래지하철역 내 타일 벽화로 보존되어 있다.

    아래는 이와 관련하여 1973년 12월 5일 실린 국제신문의 기사이다.

    「동래(東萊)길놀이」발굴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천재동(千在東)씨
    범민중적(汎民衆的) 가장행렬
    정월대보름 줄다리기의 전야제(前夜祭)
    야유(野遊)는 길놀이의 일부

    동래(東萊)민속에 길놀이가 있었다. 그 유명한 줄다리기가 펼쳐지던 정월대보름날의 전야제(前夜祭)로 벌어진 것이 길놀이와 들놀음이었다.
    정월 14일 하오 4시쯤 수백명의 가장행렬이 세병교(洗兵橋)(지금의 부산다리)나 만년대(萬年臺)(지금 동래중(東萊中) 또는 영치마당(안락(安樂)동)이나 마암곡(馬岩谷)(온천(溫泉) 2동 말바우골)에서 출발하면 길놀이는 흥겹게 막을 올렸다. 들놀음 장소에 이를 때까지 연희자(演戱者)와 관중들이 한데 어울려 웅박캥캥의 굿거리 장단에 얹혀 돌아갔던 이 길놀이는 들놀음을 앞둔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무형문화재 18호 동래야유(東萊野遊)도 별개의 민속놀이가 아니라 길놀이의 한 과정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래야유(東萊野遊)가 먼저 발굴돼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바람에 정작 주역이었던 길놀이는 잊혀져 버렸었다. 이 길놀이의 순서와 장식등 구체적인 내용이 동래야유(東萊野遊) 가면제작부문 인간문화재 천재동(千在東)씨(59)의 노력으로 밝혀지게 됐다.
    천재동(千在東)씨는 2년간의 연구 끝에 최근 길놀이의 행렬도(行列圖)를 완성, 길놀이가 재현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길놀이는 사회계급의 구별 없이 어울리는 일종의 가장행렬로 우리나라에선 다른 예가 없다. 천재동(千在東)씨의 행렬도에 따르면 길놀이는 여덟순서. 맨앞엔 큰 청사초롱 2등을 앞세우고 그 뒤엔 그해의 지신(支神)을 본뜬 초롱이 뒤따르며 5백등이나 되는 5색초롱이나 가면 연희자가 등장한다. ①6잡이(피리2 대금1 깡깡이1 장고1)가 흥겨운 가락을 뽑고 나가면 ②벙거지 차림에 창을 잡은 동자(童子) 2명을 앞세우고 중군(中軍)이 갑옷을 입고 말타며 뒤따른다. ③이어서 길군악대(장고2 대금1)와 기생 활량들이 길행군 노래를 부르며 나가고 ④그뒤엔 8선녀(仙女)(난양(蘭陽)공주 영양(英陽)공주 진채봉(秦彩鳳) 백능파(白凌波) 가춘운(賈春雲)등등)가 연화등을 들고 말에 탔는데 활량들이 말고삐를 잡고 춤추며 이끈다. ⑤야유기(野流旗)를 선두로 탈을 쓴 원양반(元兩班)-말뚝이 차양반(次兩班)-수양반(手兩班)-네째 양반(兩班)-종가(宗家)도령-영감-제대각시-문둥이-비비양반-영노 차례로 이어지며 ⑥가마탄 할미 ⑦활량과 기생들이 우(牛)차에서 노닥거리며 진행 ⑧다섯마을의 농악대에 이어 군중들이 뒤따르는 것으로 끝. 이 행렬이 들놀음 장소에 닿으면 등을 높이 매단다. 이어서 길놀이는 군무(群舞)의 장(場)으로 연속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없이 고깔과 종이탈을 쓴 군중들이 수려한 학(鶴)춤에서 성행위를 모방한 요동춤까지 별별 춤을 다추며 한 덩어리로 어울린다. 이런 분위기에서 들놀음이 진행되는데 그럭저럭 자정을 넘긴다. 천재동(千在東)씨는 이런 내용을 주로 신우언(辛祐彦)씨(75 인간문화재)의 구술을 통해 수집했다. 이 길놀이는 1930년대까지 계속됐는데 신(辛)씨는 길놀이 진행의 총무역할을 한적도 있는 분이다.
    길놀이는 서양의 카니벌 가장행렬에 비견될 수 있는 민속으로 동래(東萊) 독특한 멋을 갖고 있다. 사회계층의 구별없이 참가했던 것은 중산(中産)층이 주류였던 당시 동래(東萊) 사회를 반영하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이 길놀이의 유래에 대해선 정확한 발생연대를 알 수 없으나 동래야유(東萊野遊)에 앞서 있었던 것은 틀림 없는 일. 동래야유(東萊野遊)가 오광대(五廣大)에서 파생했지만 오광대(五廣大)처럼 연기자 중심의 가면극이 되지 않고 범민중 참여적인 대동연희(大同演戱)의 성격이 짙어진 것도 선행민속인 길놀이의 영향이란게 민속학계의 정설이다. 이런 배경을 빼놓고 동래야유(東萊野遊)만 무형문화재로 독립지정했기 때문에 본래의 분위기는 살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들놀음이 동래(東萊)민속의 중심이란 주객전도의 인상을 주게된 점이 요즘 비판되고 있는 실정이다. 천재동(千在東)씨의 길놀이 발굴을 계기로 동래민속(東萊民俗)의 종합연구가 있어야 하겠다는 전문가들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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