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위 선율을 한 올 한 올 세며 걷는 91세의 한량 문장원
지금껏 어느 인류도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걷는다.
우리 생애에 만날 수 있는 감격의 춤판
1. 판을 올리며
‘노름마치뎐’이란
‘노름마치’란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다. 곧 그가 나와서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했다. 이렇게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한다.
‘노름마치뎐’은 기획사 축제의 땅이 우리시대 최고의 명인을 찾아, 그 명인을 위한 반열의 판을 만드는 무대다. 그 첫 번째가 구순의 한량을 모시는 <춤의 문장원>이다. 이 무대를 시작으로, 고수 중의 고수를 찾아 무대에 올리는 ‘노름마치뎐’을 지속적으로 펼쳐갈 것이다.
축제의 땅(대표 진옥섭)은 초야에 묻힌 명인을 무대에 올려온 지난 15년의 성과를 모아 <노름마치(2007년 4월 생각의 나무)>라는 책으로 간행하여 전통예술과 인문학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노름마치뎐’은 책의 광대들이 책 밖에서 춤추는 공연으로, 무대로 쓰는 예술인의 생애사라 할 수 있다. 또한 책 밖의 광대를 분주히 발굴하여 무대에 올리고 다시 책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병행하여, 전통춤을 제대로 전승해 갈 기록 기반을 만들 것이다.
첫판 <춤의 문장원>
구순의 명무 문장원(文章垣, 1917), 옛 놀던 예기 200명을 지금도 기억하여 동래예기권번명단(東萊藝妓券番名單)을 작성하여 간직하고 있는 한량중의 한량이다. 그의 명단 속에는 “순사 앞에서는 무릎 꿇지 않아도 동래기생한테는 무릎 꿇는다” 콧대 높은 동래예기의 역사가 있고, 그의 몸속에는 그 예기들과 한세월 보내면서 춤에 종신했던 ‘짜’ 하던 동래한량들의 춤사위가 그대로 고여 있다.
문장원이 이룬 춤의 업적을 요약하면, 1965년 동래야유를 복원하여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유를 지정 받게 하였고, 이후 이를 토대로 동래의 흥을 하나둘 복원하였다. 1972년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 <동래학춤>, 제4호 <동래지신밟기>, 제 10호 <동래고무>, 그리고 2005년에는 제14호 문장원류 <동래한량춤>으로 지정받았다. 현재 동래의 형편이 한낱 부산의 속한 일개 구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600년의 영화를 누리던 옛 동래의 흥을 그로 복원한 춤업적으로, ‘마지막 동래한량’이란 칭호가 언제나 이름을 앞서고 있는 것이다.
현재 그가 독무로 지정받은 <동래한량춤>은 그간 명무전에서 추어온 그의 입춤을 명칭 변경하여 지정한 것이다. 젊은 날 마당판과 기방에서 춤을 습합하여 최고의 즉흥을 구사하는 데, 구순의 텅 비운 몸으로 나가 여백과 만나는 한 폭의 세한도(歲寒圖)다. 무대에 등장할 때 지팡이를 짚고 나오는 데, 그 지팡이를 놓는 자세부터 춤이다. 고령의 관절이라 오금과 돋음의 폭이 좁아들었으나 걷노라면 자연스레 밟히는 ‘엇박’은 관객의 허리를 곧추 세우고 남은 폐활량을 한데 모아 추임새를 뱉게 한다.
특히 김청만, 원장현, 박종선 등의 명연주자들이 뿜어내는 시나위 반주를 휘감고 밀고 당기는 솜씨는 실로 절묘하다. 오늘날의 춤꾼이 정해진 순서에 녹음테이프에 의존하는 현상에서 시나위 가락을 한 올 한 올 세면서 무대에서 노니는 즉흥은 분명 우리시대의 마지막 모습인 것이다.
노름마치와 함께 노니는 노름마치들
그러나 구순이시라 기력의 문제로 그가 관여 했던 모든 춤을 선보일 수 없다. 다만 그의 춤 재간이 모두 습합된 <동래한량춤>을 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춤 인생을 축하할 후배 춤꾼들이 출연한다.
전통적으로 춤판의 시작은 승무로 하였다. 삼현육각의 반주로 영산회상이 연주되는 것이 승무의 멋인데, 채상묵이 1)이매방류 <승무>로 첫판을 연다. 이어 양성옥이 2)강선영류 <태평무>를 추어 노명인의 평안을 기원한다. 오늘 춤의 거대한 문파를 이루는 이매방류와 강선영류의 튼실한 제자들이 추어 춤판의 격을 높인다.
다음은 문장원이 복원한 3)<동래학춤>을 공연하는데, 여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동래예기(東萊藝妓) 유금선의 구음 반주가 있다는 점이다. 또 군산의 예기 장금도의 4)<민살풀이춤>이 추어진다. 장금도는 83년 6월 25일 국립극장 명무전에 문장원과 함께 출연한 춤벗으로 전무후무에도 함께 무대에 섰다.
2부에서 이윤석의 5)<덧배기춤>과 하용부의 6)<밀양북춤>이 펼쳐진다. 그들의 춤 선생인 고성의 조용배와 밀양의 하보경이 모두 동래에 머물면서 문장원과 풍류의 시절을 보냈기에 그들의 제자가 춤판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장원의 7)<한량무>를 추고 마지막에는 김운태가 8)<채상소고춤>을 춘다. 김운태는 문장원으로부터 최고의 즉흥꿈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해마다 5월에 하는 동래의 춤축제에 초청을 받은 젊음 춤꾼이다.
낯설지 모르지만 아는 이들은 탄성을 지르는 최고의 ‘춤’이요 ‘꾼’들이 출연해 문장원의 무대를 더욱 굵직하게 만드는 것이다.
춤을 부르는 최고의 연주자들.
문장원의 한량춤의 반주 음악은 시나위이다. 시나위는 무속 선율을 피리, 대금, 아쟁 등의 숙련자들끼리 즉흥적으로 합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악사들끼리라도 리허설과 본 공연의 음악이 다르다. 곧 음악은 변화하는 실체이고 그 위를 오르는 것이 즉흥 한량춤이다. 그래서 노명인의 즉흥에 걸 맞는 최고의 연주자가 필요하다.
쟁쟁한 명인들이 모였다. 털 하나 안 들어가게 잘 짜여 진 우리시대 최고의 ‘시나위 드림팀’이다. 이 무대에서 전통춤판이란 가무악이 변증법적으로 정반합을 반복해 가는 ‘흐르는 실체’란 깨달음을 얻을 것이요, 순간순간에 새것이 돋아나는 벅찬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프로그램 순서
채상묵의 ‘승무’
대나무 대롱을 통과한 푸른 바람이 영취산을 돌아나가네. 그 장엄한 삼현육각에 올라서 도달한 유현의 세계. 갈대청공에 음 솟을 제 흰 장삼 절로 들린다. 마침내 모든 색을 다 버리고 흑과 백으로 각인되는 동선 너머 정적의 세계. 채상묵의 승무, 몸이 곧 법이다.
유금선의 구음과 ‘동래학춤’
예전 출입하던 한량의 복장으로 추는 춤이다. 너울너울 학 같은 춤, 종래에는 학의 동작을 생태를 더욱 형용하니 마침내 한 마리의 학으로 남았다. 호접몽처럼 학이 선비를 꿈꾸는지 선비가 학을 꿈꾸는지 분간이 묘연한 춤. 동래 본바닥 춤꾼들이 유금선의 구음에 논다.
장금도의‘민살풀이춤’
“나는 없어서 먹고살라고 이거(소리) 배우고 저거(춤) 배웠어.” 군산의 장금도는 살풀이춤을 출 때 수건을 들지 않는다. 수건을 휘두르면 호흡이 깨지기 때문이다. 어린 날 탔던 인력거, 춤던 춤, 때문에 죄인처럼 숨은 슬픈 어미. 한 손을 꺼내들면 공기의 결로 스며간다.
이윤석의 ‘덧배기춤’
농사일과 춤일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춤의 고을 고성을 지키는 실한 말뚝이 이윤석, 춤 시간을 솎아내려 오광대회관과 비닐하우스 사이를 과속하다 늘 딱지를 떼이지만, 팔 걷고 판에 들어서 굵직한 뼈대를 펼치면, 그리운 조용배, 허종복의 덧배기 가락이 너울거린다.
하용부의 ‘북춤’
아름답던 백발의 춤꾼 하보경. 우리가 한 시절 신선과 같이 살았던 기억은 옛일이 되어 이제는 손자에게 춤을 구해야 한다. 밀양강가 춤의 삼대를 흘러온 춤. 북을 울리며 그 여운에 몸을 맡기는 춤, 활개를 쉼 없이 들어 올리는 편한 호흡,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춤.
문장원의 ‘입춤(한량춤)’
첫 발짝을 떼는 춤이고 일생을 송두리째 바쳐 완성해 가는 춤이다. 문장원의 입춤은 여든 일곱 텅 비운 몸으로 나가 여백과 만나는 한 폭의 세한도다. 걷노라면 자연스레 밟히는 엇박은 관객의 허리를 곧추 세우고 남은 폐활량을 한데 모아 추임새를 뱉게 하니, 보라! 마지막 동래한량이다.
김운태의‘채상소고춤’
트럭에 말뚝과 광목포장을 싣고 황토먼지 자욱한 남도 길을 마지막 유랑 행중 호남여성농악단 단장의 아들. 칠 십 년대 가파르게 넘던 보릿고개 언덕 위의 비 새는 포장극장을 박수갈채로 채워 넣던 일곱 살 소고의 신동, 그에게 백남윤에게 받은 채상소고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