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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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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GD767최종업데이트:2020.04.24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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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선

인물소개

  • 2013년 8월 인물스페셜

    천상의 구음 소리꾼 유금선

    부산 동래 금강공원에 위치한 부산민속예술보존회의 놀이마당에는 동래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멋지게 추는 동래학춤이 유금선 선생의 구음으로 인해 더욱 그 춤태가 고와보인다. 김소희 선생(판소리)과 박병천 선생(진도씻김굿)의 구음이 유장하고 장려하다면 유 선생의 구음은 청아하고 맑기가 수정같아 그 소리가 옥을 구르듯하다. 듣는 사람이 학춤따라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착각마저 느끼게 한다.

    나아~ 날지니~ 나아~
    날지니~ 나아나아나~ 나 지루나~ 날지니~
    나아~ 알진.
    나~ 알지지니지니지루날 날~ 날지니 낫다날지니

    갑작스레 상청(上淸)으로 목을 돋운다.

    나알~날 지니~이~나 날 지니낫
    따날지니~이~지루날~
    날 날지니 낫다 날지니
    띠루띠루띠루, 띠루띠루낫

    그리고 하청(下淸) 목이 심연에 드리운다.

    날 지리질리리질 지루 질 질
    지리 지루루 내 알지나
    날 날 지루루랏 지루지루지루 지릴리 릴리루

    상·하청을 넘나드는 맑고 고운 소리가 천상의 소리인 양 놀이마당에 울려퍼지면 구경꾼들은 넋을 잃게 마련. 어느듯 뚝 떨어져 잔잔하게 소근거리듯 귓바퀴를 간지르는 하청은 우리를 지극히 편안하게 만든다.

    ‘디 디디리리리~ ’ 두텁다가 얇은 소리가 한데 어울리제면 영락 없는 아쟁소리이며, ‘디리릴리~ 릴리~ ’ 대금의 성음도 간극으로 나뉘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여울에 물 흐르듯 부드러우면서도 결코 절제를 잃지 않는 소리이다.

    구음소리꾼 유금선(柳錦仙, 1931년 생)

    어릴 적부터 들은 소리를 귀동냥만으로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소리를 찾아 15살 때 부터 스승을 모시고 배운 세월이 오늘의 그녀를 있게 한 것이다. 판소리, 가야금, 대금, 아쟁 등 스승을 따라 배운 공부가 다양한 악기소리까지 구음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소녀 유금선은 어릴 적 동래권번(東萊卷番) 이웃에 살았다.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는 더 일찍 딴 세상사람이 되어 일찍부터 사촌언니(서국향)에게 맡겨진다. 담 넘어 권번의 울긋불긋 채색옷 입고 소리공부하는 애기기생들이 부러웠다.
    애기기생들의 입성도 그러려니와 소리공부하고 대접받는 모습에서 부모 없는 설움을 빗대었던 것일까. 보다 못한 언니가
    “그러면 학교공부 때리 치우고 소리공부나 해라”
    고 해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디니던 학교를 작파하고 권번에서 동냥소리를 배우지만, 언니의 뒷바라지는 번덕이 심해서 소리공부는 끊었다 이었다가를 반복한다. 아무 일도 이루는 것이 없겠다 싶어 안달이 났다.
    15살이 되면서 소리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사촌언니를 졸라 신분보장 추천을 서게하여 동래권번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이후 10년 간은 뼈를 깎는 아픔으로 소리공부에 매진하였다.

    첫 번째 소리선생은 성이 박씨인 선생이었고, 두 번째 선생은 전라도 큰 소리꾼 박기채였으며, 세 번째 선생은 최장술, 강창범 등이었다.
    판소리 다섯 마당을 배웠다. 소릿제 대로 열심히 배웠다. 나이들면서 깊은 공부를 위해 친구 몇몇이서 더 좋은 선생을 별도로 초빙하여 소리공부를 하기로 맘 먹고 당시 전라도 일원에서 명창대열에 서 있던 장영찬(張泳瓚), 공기문 선생을 모신다. 경상도의 억센 어투는 전라도 어투의 ‘아니리’를 소화하기 힘들게 하였지만 소리목 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자신이 생겼다. 타고난 목구성을 제대로 살린 소리를 구사하여 소리판에서 빠지지 않았다. 명창이 되기 위한 소리공부가 아니라 들려주는 소리, 들어서 즐거워하는 소리를 배웠다. 그러니까 판소리 한마당을 짜는 연주자로서의 소리공부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리공부는 끝이 보이질 않았다.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던 유금선의 소리공부는 25살에 그만둔다. 그리고 결혼을 한다. 가난하게 산 세월이 너무 서러워 합판공장을 크게 하는 부자영감의 작은 댁으로 들어 앉았다. 그러면서 소리공부를 의식적으로 멀리 하였다. 판소리 바탕들이 채곡히 기록된 큰 책들도 불태우면서 그 어려운 소리공부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서울에도 미아리에 집이 세 채나 있는 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을 한다. 그러다 41살에 부군이 위암으로 별세하므로 다시 혼자가 되었다. 딸린 자식들도 없이.
    부군이 물려준 돈으로 온천장에다 일식요리집을 크게 내었다. 호사다마라고 복어요리로 인해 생긴 불상사를 수습하느라 법원에 들락 날락하면서 변호사 선임비용 등으로 경비가 수월챦게 들었다.
    다시 동래세무서 뒤에 요정 ‘오미정’을 열었다. 그때 나이 45살 때이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세월따라 요정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10·26 사태 이후 요정 단속령이 내려지면서 식당업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그런 삼화식당 시절이 7,8년 물 흐르듯 흘러갔다.

    도화(桃花)는 어찌하여 홍장(紅粧)을 짓고 서서
    세우동풍(細雨東風)에 눈물이 무슨 일인고
    춘광(春光)이 덧없음을 못내 슬퍼하노라

    유금선의 인생항로가 부안기생 이매창(李梅窓)의 시를 닮았다. 어릴 때 부모 잃고 사촌집에 의탁하다가 정인(情人) 만나 16년 꿈같이 지나가 버렸는데 돌아보니 뜬 구름 세월이고 느느니 한 숨 뿐이라서 담배와 화투로 벗을 삼았다. 이성과는 담을 쌓기로 하였다.
    한 번 맺은 짝으로 평생을 마음에 묻어두고 살기로 결심한다. 떠난 사람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남편이 만들어 준 재산들은 오며가며 길거리에 뿌리고 남 빌려 주어서 떼이었다. 화투판에 내버린 돈도 수월찮았다. 문득 정신차리고 앞을 보니 나이는 60이 훌쩍 넘었는데 주위는 아무도 없이 외톨이가 된 느낌뿐이다.

    85년 54살 때 부산민속예술보존회에 입회한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아재’라 부르며 따랐던 문장원(文章垣) 선생의 권유였다. 동래학춤이 일품이던 김희영(金熙英, 1923~1972) 선생의 춤에 장단 붙여 부르던 구음을 문장원 선생이 기억해 두었었기 때문이다.
    동래줄다리기의 역사 못지 않게 예부터 동래에 전승되어 오던 학춤은 춤꾼의 차림새부터가 주위시선을 끈다. 하이얀 바지저고리에 명주도포를 걸치고 통영갓을 썼다.
    가슴엔 흰 주릿띠를 매고 미투리를 신어 최고의 멋을 내었다. 풍물패가 동래 특유의 굿거리장단을 매기고 유금선 선생이 구음을 더하면 멋진 학춤이 펼쳐진다. 옛 어른들 중 학춤의 명수로는 김희영의 아버지 김귀조(金貴祚, 1886~?)와 김문수(金文洙, 김동원의 부친), 김필상(金弼相), 최순임(崔順任) 제씨들이 있었고 2001년에 고인이 된 김동원이 예능보유자였었다.
    유금선 선생은 성음이 참 좋다. 목구성이 좋은데다 어릴 때부터 권번에서 익혀온 창법을 스스로 터득하여 구음을 만들었기에 상청에서도 쇳소리가 나지 않는다. 상청과 하청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고준함과 깊은 속내를 간직하고 있다. 적절하게 떨고(搖聲), 구르고(轉聲), 흘러 내리고(退聲), 밀어 올리는(推聲) 농현(弄絃)과 시김새가 일품이다.

    대금소리가 들리다가 어느듯 아쟁소리로 바뀐다. 결코 급하지도 않으면서 계곡과 협곡을 구비쳐 돌아 여울에서 장강에 이르듯 그렇게 소리는 흐른다. 정작 유금선 선생은 춤을 위해 정형화된 구음보다 시나위나락에 맞추어 짜는 구음이 더 자유로와 좋단다. 벼라별 음색과 가락을 계면조의 육자배기에 얹어 신명을 풀고 싶지만 그런 기회는 쉽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란다.
    동해안별신굿 김석출 선생의 장구 구음과 진도씻김굿 박병천 선생의 징 구음은 굿을 위한 구음으로 그 소리와 꾸밈이 단조로울 뿐이지만 선생의 구음은 한 입으로 다양한 여러 소리를 상·하청으로 꾸며내고 있어서 어떤 경우 보다 더 값진 것이다.
    선생의 구음을 배우려는 이들은 많으나 소리공부를 제대로 하려는 이가 없어 선생의 구음을 이어받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구음으로 전달받아 구음을 배우겠다는 전수태도는 모방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판소리와 육자배기 시나위들을 피나게 익히는 과정에서 소리꼴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고 이러한 흐름이 구음으로 이어져야 옳겠다는 생각이다.

    자기 토리의 구음을 스스로 창작해야 된다는 말이 되겠다.

    목소리 하나로 칠십 평생 소리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타고난 성음제자 만나 바른소리 올곧게 가르치려는 욕심 하나로 다른 욕심일랑 벌써 벗어 던져 버렸다.
    박기채-최장술·강창범·장영찬·공기문-유금선으로 이어지는 계보에 못지않은 구음제자가 탄생된다면 동래학춤 구음 선구자로서 유금선 선생은 더 바랄 나위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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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주경업
    1961년 국립 부산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부산 및 경남의 중등학교 미술교사 및 연구사로 근무, 1983년 전업화가를 선언, 그림 주제를 전통문화에서 발견하기 위해 전국의 춤판, 소리판, 굿판, 놀이판을 찾아 그림으로 재현하고 예·기능을 지닌 어른들을 만나 그들의 전통 예술세계와 삶을 기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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