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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주

문화예술인 전통예술인 전통예술 동래야류

NO.AGD2542최종업데이트:2017.07.17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프로필

양세주

  • 분류문화예술인
  • 이름양세주 / 梁世珠
  • 생년월일 1922년
  • 출생지 부산 동래
  • 사사 (師事) 박덕업-가면제작 외.

인물소개

  • 양세주(梁世珠)[1922~1988]는 1922년에 부산동래에서 태어나 자란 토박이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1930년 중반까지 매년 전승되던 「동래 야류」를 관람하였으며, 「동래 야류」를 쫓아다니며 꽹과리를 쳤고 동래 지역의 당제 등을 구경하며 전통 예능을 가까이서 접하였다. 10대 후반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철도 공작창에서 공원으로, 만주에서는 선반공으로도 일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해 악극단에 입단하여 유랑 극단을 따라다녔다. 국악 장단에 능숙했던 양세주는 악극단에서 드럼·기타·트럼펫 등의 서양 악기를 배웠다. 음악적 재능이 탁월하여 악기를 다루는 실력도 출중하여 여러 악기를 섭렵하였다. 양세주는 6·25 전쟁이 휴전된 후 동래 카바레와 부산 온천장제일 관광 호텔 6인조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양악기로 활동을 했어도 어린 시절부터 배운 국악 장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양세주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어쩔 수 없는 엽전이더라.”라고 『국제 신보』[1972년 2월 2일자] 인터뷰 기사를 통해 말하였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표현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고백이었다.

    40세에 양악기 악단들과 결별하면서 양세주는 우리의 전통 예능에 관심을 다시 불살랐다. 1961년 전통 민속 연구에 참여하여 실제 인물을 찾아 발굴시키는 창립 멤버가 되었고, 1965년에는 동래종다방 옥상에서 자료를 모으고 연습을 하면서 부산 민속을 재발견하고 중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65년 서독 대통령의 방한 때에 환영 행사에서 상쇠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1971년 6월 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 「동래 야류」[악사역]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동래 학춤」의 명인이기도 하여 양세주는 멋들어진 춤으로 일본 니콘 카메라의 월간지 표지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1940년대 후반에는 「동래 야류」의 명인인 박덕업(朴德業)으로부터 「동래 야류」의 탈 제작 방법을 전수받아, 1971년 4월과 5월에는 서울코스모스 백화점에서, 6월에는 부산시 공보관에서 탈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서울 전시회에서는 「고성 오광대」·「하회 별신굿」·「봉산 탈춤」 등의 탈과 함께 전시하였고, 부산 전시회에서는 창작 탈을 전시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연(鳶)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연동우회를 조직하여 연 날리기의 국제 교류에도 힘을 쏟은 바 있고, 능통한 일본어 실력에 민속 예능 교류 성과 등을 활용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 일본 홍보 사절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다.

    또 양세주는 부산전자공업고등학교에서 「동래 야류」를 연수시키는 데도 적극적이었고, 1987년 2학기에는 부산대학교 무용과에서 민속 연희 과목을 강의하였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양세주는 1988년 1월 8일 폐질환으로 사망하였다. 유족과 수많은 제자, 부산 시장, 문화재 관리 위원, 일본 조의 사절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이 치러졌다.

    양세주는 성품이 온순하고 열정적인 탓에 신명 나는 음악과 춤에 남다른 집중을 보였다. 키 180㎝에 몸무게 65㎏의 커다랗고 마른 몸매를 가진 남자의 몸에서 풍겨지는 춤사위의 풍류와 풍물 장단의 흥겨움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손색이 없었다. 부인 전덕명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으나, 일찍 상처하였다. ‘학은 70%밖에 모이를 먹지 않는다’거나 ‘전통 예술을 빙자하여 빵을 얻는 무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등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였으나, 전통 예능에 몰두한 탓에 가정을 등한시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윤택한 가정을 꾸리는 데 능숙하지 못해 가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자녀들은 양세주의 예술 정신을 이해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나 자녀들 중 양세주의 예능을 이어가는 사람은 없다. 양세주는 가족과의 대화도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랬던 탓에 ‘자녀에 대한 사랑이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양세주의 맏며느리에 따르면 딸을 시집보내던 날에 꽹과리를 치며 눈물 짓던 양세주의 모습에서 자녀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주요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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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활동사항 - 년도, 활동내역,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년도 활동내역 비고
1988 별세  
1987 부산대학교 무용과 민속연희 부분 출강  
1985 동래구 기영회문화회관 일친선가면전 출품
09.19-20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동래학춤 참가
 
1981 10,22-24 제2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동래학춤 참가  
1975 09.13-15 제1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동래지신밟기 참가(동대문운동장)  
1972 제1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동래지신밟기> 상쇠역 문공부장관상 수상  
1971 04월. 서울 코스모스 백화점 전래·창작가면 전시회 출품
06월. 부산 공보관 탈 전시회 출품
 
1970 중요무형문화재 제 18호 동래야류 악사 및 가면제작 예능보유자 인정  
1965 제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동래야류> 대통령상 수상  
1961 전통 민속 연구 참여·예술인 발굴  
1941 악극단 입단  

해당장르

  • 장르 문화예술인 > 전통예술인 > 전통예술 > 동래야류
  • 역할 무형문화재
  • 대상 일반인
  • 키워드 #전통예술인#무형문화재#동래야류#양세주

주요작품

교육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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