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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벽동인

문화예술단체 시각예술단체 회화 서양화

No. AGD1115최종업데이트:2017.01.12

자료등록 : (재)부산문화재단 본 내용은 등록자에 의해 작성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프로필

  • 분류문화예술단체
  • 단체명(한글/한문/영문)토벽동인 / 土壁同人
  • 설립년도1953
  • 주소 부산
  • 이메일

설립목적 및 단체소개

  • 토벽은 1953.3.22-29 루네쌍스다방에서 서성찬, 김영교, 김윤민, 김종식, 임호, 김경 등이 결성하였다. 이들은 피난화가들이 활발히 제작 활동하던 51, 52년에 생사의 갈림길을 초극해 보려는 무의식이 서양의 리얼리즘에 근거를 두고 작화를 하기 위해 53년 토벽동인전을 개최한다고 했다. 제2회 토벽동인전 활판 팜플렛에 의하면 "토벽 기슭에도 밝은 가을볕은 쪼이고 있습니다. 흙담너머로 보이는 감나무가지에는 붉게 물들인 감들이 푸른 하늘에 유난히도 빛나고 있습니다. 조국재건의 가을입니다. 얼마나 수고들 하십니까. 저희들 토벽동인은 이번에 두 번째 전람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화가이면서도 그림만 그려서는 먹고살지 못하는 무능한 저희들은 교단에 서는 여기에 혹시는 까물거리는 호롱불 아래서도 재료의 빈곤에 비애를 느끼면서도 그려보았습니다. 오로지 제작만이 저희들의 삶이요 절대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어진 폐허에 토벽이나마 자꾸만 쌓아올려야겠습니다. 마천루보다 더 높이 저 하늘에 별에까지라도…."
    조국재건의 가을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너무나 요약적으로 적시해주기도 한다. 재료와 이해부족 그리고 작가 의욕 사이의 고통으 읽게 하는 인사말이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으로 미루어 서정적인 세계인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적인 표현과 리얼리즘과는 다르다>는 충돌이 생겨 2회(53년)때는 서성찬을 제외한 5명만이 발표했고 3회 역시 5명으로 구성되었으나 임호의 작풍과 김경의 작풍이 리얼리즘을 표방하면서도 혼재된 내용은 포비즘과 큐비즘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표출이나 대상설정의 차이가 논쟁으로 승화되어 각자의 작화에 명백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입씨름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쉬웠다. 피난화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산화가들이 창의성 없이 자연의 모방을 일삼고 있을 때 김경의 황소, 농민, 명태, 항아리 등을 소재로 한 검붉은 토속색의 리얼리티는 한 과도기에 있어서 생명력 있는 존재였다. 그에 못지 않게 담백한 화풍에서 우둔하고 굵직한 선으로 조형을 꾀한 김종식의 끈질긴 노력도 돋보인다.
    토벽동인은 서구의 합리주의가 토착화할 수 있는 선구적인 계기를 마련하였고 유화를 적극성있게 흡수한 진지한 同人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차질이 있을 때는 자유로이 분산하여 자기완성에 성실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그룹의 이합집산이 단지 인간적인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이념적인 대립에 의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태도는 다음 세대에서도 흔히 목도되는 일이기도 하다. 50년대 초 양식의 의견 대립으로 한 모임이 해체되는 경험은 부산미술사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용길. 2004.2.4 "내가본 부산 미술(24)", 『부산일보』
    부산임시수도 시절, 부산바다 기슭에 갖가지 고기떼처럼 피란화가(특히 서울화가)들이 밀려와 머물려 여러 꼴로 미전을 펼치고 있을 때 제1회 토벽동인전(土壁同人展 1953.3.22-29 다방 르네상스>이 열린다. '토벽'이라는 정서에 마음을 모았던 화가는 서성찬(1907-1958), 김영교(1916-?), 김윤민(1919-1999), 김종식(1918-1988), 임호(1918-1974), 김경(1922-1965)이었다. 같은 해 10월 4일부터 11일까지 휘가로 다방에서 펼쳐진 제2회전은 서성찬이 빠진 채, 환도로 서울의 피란화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그 이듬해에 제3회전이 창선동 국제시장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실로암다방에서 2회전 때처럼 다섯 화가만으로 마음을 모아 펼쳐진다. 창립전을 열었을 때, 이들 나이는 서성찬이 46살, 김영교가 37살, 김윤민이 34살, 김종식이 35살. 임호 35살, 김경 31살이었다. 서성찬을 제친 다섯 사람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그림을 제대로 배워 익혔던 이들이다. 김윤민과 임호는 오사카미술학교에서, 그리고 김영교는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김종식을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김경은 일본대학미술학과에서 제가끔 서양미술사를 배우고 나름대로 서양그림솜씨를 가려잡아 익혔다.
    이들의 학습기가 곧 부산미술문화에 서양그림을 받아들이게 되는 도입기에 들어맞게 된다. 아울러 서성찬도 도입기에 해당되는 화가이다. 그는 용두산에서 일본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고 여러 차례 일본미술계를 견학하면서 서양그림을 혼자 익혔던 독학화가였기 때문이다. 도입기(학습기)를 거친 이들은 해방 뒤부터 부산임시수도를 거쳐 모색기 또는 정착기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해방 뒤, 1946년 우리 힘으로 부산미술가동맹(뒤에 부산미술협회로 바뀌어 오늘에 이름)을 조직하고 부산미술전람회(공모 1948,1949)를 다스렸던 활동을 수용기(또는 자치기)로 여긴다면 우리 정서에 걸맞는 서양그림들을 더듬어 찾으려 했던 '혁토사'와 부산임시수도 때 '토벽'의 활동도 모색기에 든다. 토벽동인 가운데 서성찬, 김종식, 김윤민들은 부산미술가동맹을 조직하여 1946년 3.1절 기념전을 마련한 뒤 부산미술가협회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1950년대부터 임호, 김경, 김영교들도 합세하여 잇따라 또는 가끔씩 서양그림을 선보인다. 그러는 동안 김영교가 제외된 다섯 작가는 부산미술전(공모전, 1948,1949 민주중보사주최)에 초대 · 운영 · 심사 따위로 참여하게 된다. 모색기에 들어섰을 때, 서성찬, 김윤민, 임호들이 혁토사에 참여하여 사실주의 그림솜씨를 받아들이고, 제가끔 다른 표현양식으로 우리 풍토를 밑거리 삼아 서양그림을 모색한다. 그러는 가운데 갑자기 6.25가 터져 부산으로 밀물처럼 들어와 갖가지 그림솜씨를 펼친 피란화가를 맞이하게 된다. 그들은 세잔, 고갱, 브라크, 피카소, 우메하라를 흉내 내는 그림솜씨와 아울러 클래식, 리얼리즘, 쉬르레알리슴, 아방가드르의 분위기가 풍기는 그림들을 선보였는데, 그에 맞닥뜨려 그 잘난체하는 겉핥기 그림솜씨에 제곳 작가들은 넌더리를 느낀다. 왜냐하면 토벽동인들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미술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에 맞선 움직임이 토벽동인전이었다.
    남부의 토속다운 향심이라 할까. 제 바닥 풍속에 마주한 마음이 짙은 그림을 그리고자 한 움직임이 토벽동인전의 이념(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겨레의 몸바탕이 풍겨내는 땀 냄새에서 우러나오는. 겉치레가 아닌 참된 겨레미술의 으뜸꼴을 생각하고 그것을 나타내려고 하였던 것이 토벽동인의 움직임이었다고, 그때의 부산화가들이 입 모아 후진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부산미술문화에 서양그림이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데에 이바지한 그 첫 밑보기가 토벽동인전이었던 것이다.

주요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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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활동사항 - 년도, 활동내역,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년도 활동내역 비고
1954 제3회 토벽동인전
김영교, 김경, 김종식, 김윤민, 임호 참여
 
1953 3.22-29 루네쌍스다방 토벽동인창립전
서성찬, 김영교, 김윤민, 김종식, 임호, 김경 등 참여
10.4-11 휘가로다방 제2회 토벽동인전
김영교, 김종식, 김윤민, 임호, 김경 등 참여
 

해당장르

  • 장르 문화예술단체 > 시각예술단체 > 회화 > 서양화
  • 역할 예술단체
  • 키워드 서양화#루네쌍스다방#휘가로다방#서성찬#김영교#김윤민#김종식#임호#김경#피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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