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이 논의하고 결정하는 문화도시의 미래
문화도시 정책과 문화민주주의
이영준(김해문화도시센터장)
‘문화도시’의 정책적 의미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르면 "문화도시"란 문화예술·문화산업·관광·전통·역사·영상 등 지역별 특색 있는 문화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문화 창조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제15조에 따라 지정된 도시를 말한다. 당연히 지역이라는 ‘분권’과 시민 중심의 사업설계라는 ‘상향식 정책구조’가 담겨 있다. 과거 한국의 문화도시 정책은 ‘유럽의 문화수도’ 정책을 수용해왔다. 영화의 도시 부산, 역사문화의 도시 경주, 전통문화도시 전주, 백제문화도시 공주ㆍ부여,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광주 등 엄청난 예산을 하드웨어에 집중하면서 ‘특성화’했던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문화도시에 대한 정책적 개념이 모호하고, 법적 근거가 없으며, 지나치게 하드웨어 중심의 인프라 사업이 우선되어 있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지역문화진흥법 상의 법정 문화도시 사업이다. 현재 문화도시 지정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2020년 제3차 예비도시 지정을 위해 전국에서 40여 개의 도시가 응모할 정도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지역문화진흥법에서 설계된 문화도시의 정책적 의미는 첫째 ‘지역 특성화’, 둘째 ‘상향식 사업설계’, 셋째 ‘도시경영의 원리로서의 문화’, 넷째 ‘시민 문화권과 시민력’의 강조라고 말할 수 있다. 지역특성화와 상향식 사업설계는 시행령에 그대로 명시되어 있어 부연설명이 필요 없다. 문화도시 사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이유는 이제까지 한국의 문화정책 중 상향식 의사결정 구조로 되어 있는 유일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도시 정책의 중요한 시사점은 도시경영의 원리가 산업이나 경제적인 관점으로 이해해온 관성에 새로운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 관점을 도시 전역으로 확대하는 것은 문화도시 사업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다시 말해 개별사업의 참신함이나 탁월함이 아니라 도시 경영 시스템을 만드는 일, 그리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폭넓은 협치의 구조가 문화도시 사업을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모든 문화정책사업은 전문가의 영역이거나 행정의 의지였다. 문화도시 사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차재근 지역문화협력위원장이 말한 것처럼 ‘플러스로서의 시민’을 어떻게 조직화하고 사업의 주체가 될 수 있게 만드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야만 ‘문화권과 시민력’도 실현 가능해진다. 아직도 헌법에 규정되지 못한 권리로서의 문화.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로서의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 그래서 관객이라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시민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시민을 만드는 일이 문화도시의 가장 중요한 핵심과제다.
문화적 주체로서의 시민 - 문화도시 김해의 사례
김해와 문화도시와의 인연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문화도시 예비사업으로 설계되었던 문화특화지역조성사업에 응모하였고 2017년 선정된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에 대한 인가가 나지 않아 본의 아니게 1년을 더 준비했다. 2018년 문화특화지역조성사업에 선정되어 사업을 진행하며 동시에 예비도시에 신청하였고, 지정되었다. 1차 문화도시 예비도시는 10개 도시. 하지만 2019년에 7개 도시가 선정(부천, 천안, 청주, 원주, 포항, 서귀포, 부산 영도구) 되고 3개 도시는 탈락(김해, 남원, 대구)의 고배를 마셨다. 현재 김해는 12개 도시와 함께 2차 예비도시로 12월 말 문화도시지정을 앞두고 있다.
김해문화도시사업 중 문화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만들기 위한 사업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해는 2019년 문화도시 지정에서 탈락했다. 지정탈락 이후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문화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만드는 방법론이었다. 사실 시민참여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예비도시는 없다. 김해 역시 수없이 많은 포럼과 워크숍을 통해 시민들을 만나왔고 이들과 함께 사업을 진행해 왔다. 그런데도 이를 ‘구조화’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새롭게 설계된 사업이 ‘문화도시 협의체’와 ‘도시문화 실험실’이다. 문화도시협의체는 이제까지 산발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논의 테이블을 하나의 형식으로 구조화했다고 보면 된다. 김해의 문화도시협의체는 행정, 유관기관 및 단체, 시민이라는 3가지 트랙으로 운영하고 있다.
① 행정협의체
문화도시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앞서 서술했듯이 ‘문화’라는 관점으로 도시를 ‘경영’하는 일이다. 그래서 문화도시협의체는 도시의 광범위한 영역을 다룬다. 먼저 행정과의 논의 테이블은 문화예술과 등 관련 있는 과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을 비롯해 김해시 전 부서의 국ㆍ과장이 참여하는 폭넓은 협의체를 구성했다. 문화예술분과 (문화예술과, 관광과, 가야사 복권과), 행정분과(기획조정실, 행정자치국), 도시분과 (도시관리국, 안전건설교통국, 농업기술센터), 휴먼웨어분과 (인재육성사업소, 일자리경제국), 복지 및 환경분과 (시민복지국, 환경국)으로 나눠서 논의를 진행했다.
문화도시 사업에 대해 설명을 하고, 각 부서에서 하는 사업 중 문화와 관련된 사업들을 선별했다. 그리고 그 사업 중에 문화도시와 연계 할 수 있는 일종의 과제들을 만들고 이를 위한 세부적인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행정은 문화도시 사업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고 문화도시사업은 더욱더 폭넓은 영역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책 전반에 진행되고 있는 문화적인 사업을 공론화함으로써 공동의 지향점을 발견하는 테이블이 만들어진 것이다.
② 유관기관 및 단체 협의체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김해에도 다양한 기관들이 운영되고 있다. 사회적 경제주체, 예총, 민예총, 문화원, 중소기업비지니스센터, 복지재단, 외국인인력지원센터, 도시재생지원센터 등 문화도시와 연관된 기관들과의 논의 구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들 고유의 업무 역시 문화도시 사업과 연계해야 할 지점들이 많다. 예술단체인 예총ㆍ민예총과 함께 지역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협의해야 하고, 문화원과 함께 해야 할 사업도 많다. 특히 김해는 문화도시 분야 중 역사전통 분야에 신청했다. 그런 면에서 문화원의 역할은 매우 크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 조직을 활성화하고 특히 문화 분야의 조직을 확대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재생과는 깊은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도시재생에서 구축한 동상동 다어울림생활문화센터와 무계웰컴레지던시를 김해문화도시센터가 운영하는 것은 도시재생과의 협업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③ 시민협의체 - 도시문화실험실
도시문화실험실은 2020년 김해문화도시 예비사업의 꽃이다. 시민협의체의 핵심적인 요소이면서 워킹그룹의 역할을 접목한 구조다. 김해문화특화지역조성사업 2년 동안 ‘말하는 김해 듣는 김해’, ‘권역별 포럼’, ‘소규모 라운드테이블’, ‘100인 토론회’ 등 시민을 만나기 위한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러한 토론회를 통해 ‘말하는 시민’은 만들어졌지만 ‘행동하는 시민’으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를 느꼈다. 이 부분을 함께 고민했고 그 결과 ‘도시문화실험실’이라는 구조를 만들었다.
김해는 기초지자체지만 서울 면적의 2/3 규모의 큰 도시다. 그래서 김해를 5개의 권역으로 나누고 각 1개의 도시문화실험실을 만들었다. 실험실별로 책임연구원 3명, 시민연구원 10명이 활동하는 구조다. 수다실험실을 통해 끊임없이 의제를 토론하고 지역 리서치를 진행함과 동시에 문화적 실험을 할 수 있는 사업을 지역민과 함께 기획한다. 이 문화적 실험에 대한 실행 여부도 시민들이 직접 결정하였다. 의제설정과 사업기획을 하나의 구조로 통합함으로써 시민들의 참여 의지를 높였고, 예산과 집행의 모든 권한을 도시문화실험실로 넘겼다. 아직 예단하긴 이르지만, 성공적인 시도라 생각하고 있다. 시민을 대상화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개입을 최소화했다. 도시문화실험실은 문화도시로 지정되면 최소 50개에서 최대 100개의 조직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그래서 지역별로 도시문화실험실이 마을마다 활동하는 시민조직으로 성장시켜나갈 것이다.
문화민주화 그리고 문화민주주의
한국의 문화정책은 문화예술의 국민적 향유확대라고 하는 ‘문화민주화’의 개념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정책은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다. 문화를 문화예술이라는 좁은 범주로 인식하게 했고, 수없이 많은 공연장과 전시장을 만들어도 이를 향유하는 계층은 제한적이다.
우리나라의 ‘문화민주화’ 정책은 1982년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여 문화예술 지원에 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구체화하였다. 그 이후 문화민주화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공연장과 미술관이 지어졌다. 하지만 전국 251개 문예회관 419개 공연장의 공연 실적을 살펴보면, 총관객 수는 9,513,409명(평균 22,705.0명)이다. 그중 유료 관객 수는 3,151,415명(평균 7,521.3명)으로 조사되었다. 1년에 국민의 6.1%가 돈을 내고 공연을 본 셈이다. 전국 지자체 226개보다 많은 251개의 문예회관을 엄청난 예산을 투여해 만들었지만, 이 수치는 ‘문화민주화’ 정책이 가진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반면 ‘문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은 2000년대부터 꾸준하게 논의되었고, 2014년 ‘지역문화 진흥법’에서 구체화하였다. 문화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개념은 ‘문화적 주체로서의 시민’이다. 문화민주화가 향유의 주체, 관객으로서의 시민이라면 문화민주주의에서는 ‘문화권’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민주주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이론가 이동연은 ‘문화권’을 ‘환경, 생태와 더불어 우리 시대의 중요한 영역으로 부상되는 독자적인 권리’라고 언급했다. 다시 말해 문화예술을 넘어 문화를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문화민주화에서 문화민주주의로의 흐름은 동시대 문화정책의 가장 의미 있는 전환(Paradigm shift)의 가치를 담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문화 민주화와 문화민주주의, 그사이 어디쯤 ‘문화도시’라는 정책적 의미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