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연구센터에 바란다
이지훈(필로아트랩 대표, 부산문화재단 정책위원장)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가 출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래도 ‘전문성’과 ‘맞춤형’이란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 알다시피 부산문화재단은 부산시 출자·출연기관이다. 예산도, 정책도 부산시가 마련한 틀에 맞게 운영된다는 뜻인데, 이 상황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내 문화계가 모범으로 여기는 영국 예술위원회도 상황은 비슷하다. 정부는 위원회를 통해 정책을 구현한다. 정부는 어느 분야를 우선 지원하는가에 관한 ‘전략적 우선순위’를 명시하고, 그것은 위원회와 체결하는 ‘지원금 합의문서’(Funding Agreement)로 실현된다.
그 유명한 ‘팔 길이 원칙’ ‘불간섭주의’도 위원회가 정부와 협의 없이 독자적인 정책 판단과 결정을 내린다는 원칙이 아니다. 위원회가 정부와 정책적 협의를 거친 뒤, 세부 프로그램 개발과 지원금 분배에 있어 독자성을 가진다는 원칙이다. 이것이 팔 길이 원칙의 현실이다.
이 관점에서 부산시와 문화재단을 생각하면, 시가 재단을 통해 정책을 실행하고, 재단이 자율적 전문가 집단을 통해 세부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지원금을 배분하는 것은 팔 길이 원칙에 부합한다. 그런데도 상당수의 전문가가 문화재단의 시급한 과제로 ‘자율성과 독립성의 보장’을 꼽는 이유는 뭘까.
문화재단의 프로그램 개발이 기대에 못 미친 것이 한 가지 이유일 듯하다. 지원 프로그램을 예로 들면, 아직도 문화예술진흥이 창작자 지원 중심으로 꾸려지는 것 같아 아쉽다. 창작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창작 지원이 문예진흥의 전부가 돼선 안 된다는 말이다.
문학이라면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공간이 넓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문학작품이 유통, 소통되는 방식을 파악, 개선하고 생활문화동아리 실태, 국내외 문학행사·축제를 연구해야 한다. 또 문학이 부산지역의 사회적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도 고민해봐야 한다.
이처럼 문예진흥에서 창작 지원만큼 중요한 것은 ‘창작 외적인’ 활동 지원이다. 예술매개(홍보, 교육·컨설팅, 정보·교류, 공간), 생활문화, 사회적 가치 실현 활동에 대한 지원이 함께 필요한 것이다. 이 ‘큰 그림’ 속에서 각 분야 프로그램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부산시도, 문화재단도 ‘충분히’ 잘하진 못한 것 같다. 부산시는 비록 큰 그림은 그려도, 전문·세부 프로그램 개발을 맡을 담당자의 연속성과 현장 밀착이 부족했고, 문화재단은 ‘그날그날’의 업무 수행에 급급한 나머지 큰 그림 속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가 이 일을 맡는 것이 적합하다. 지속적인 연구를 할 수 있고, ‘현장’과 닿아있으며, 지역 커뮤니티, 예술인들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정책연구센터는 큰 그림 속에서 지역의 전문가와 시민들과 함께하고, 그와 동시에 전문가와 시민들을 연결해야 한다. 문화재단의 전문성과 맞춤형 프로그램 개발의 동력은 여기서 나올 것이다. 또 그래야만 예술가와 시민들에 도움을 주는 ‘선진적’ 조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 동안 문화재단이 한 일이 많다. 그럼에도, 문화재단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더 많을 것 같다. ‘커뮤니티 아트’ ‘문화다양성’ 분야의 비중은 해가 갈수록 커질 것이고,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 실현’도 공허한 표어로 그치지 않으려면 구체적인 지표 개발과 사례·모델 발굴이 시급하며,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지속가능한 발전목표’에 상응하는 문화콘텐츠와 ‘인문·기술 융합’ 문화콘텐츠 개발은 얼마 안 가 현재의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지금 시대의 변화는 문화재단이 단지 해마다 예술창작 지원금을 나눠주는 기관이 아니라, 장기적인 정책을 세우고 연구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기를 요청한다. 올해 정책연구센터가 출범한 것은 타이밍이 적절하다. 시대정신에 걸맞은 정책 연구의 중심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