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뉴딜사업)프로젝트-우리동네 미술'을 돌아보며
홍경한(미술평론가)
1. 공공미술이란 무엇인가. 이를 네 가지로 정의하면 이렇다.
첫 번째, 공공미술은 기본적으로 공공의 요구에 공공적 가치를 지닌 미술로 부응하는 방법이다. 이는 공공공간에 미적 가치가 있는 오브제를 들여다 놓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술을 매개로 어떻게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동화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예술가들의 고민이 공공의 주체인 시민에 의해 승화되는 과정과 결과를 모두 포박한다.
두 번째, 공공미술은 지역민과 소통하고자 하는 명확한 태도 아래 공동체에 주목하고 특정한 문제와 사안, 자신의 주변 환경에 대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경험을 다룬다.(그곳(장소)에서 행해지는 예술은 당연히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할뿐더러,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무엇이 될 때 가장 이상적인 공공미술로 평가된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심미적 안위가 아닌, 미술을 언어로 한 메시지이자 또 다른 방식의 민주주의의 실천이다.
세 번째, 공공미술은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와 현상에 대한 예술가의 개입과 예술적 실천이 긍정적일 수 있다는 주민들의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소통과 참여, 교감은 필수적이다.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경계를 벗어나 소통과 참여를 통해 작가와 시민이 함께 ‘사회적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발전하면 우리가 공공미술에서 흔히 말하는 ‘공공성의 실현’이 된다.
네 번째, 공공성의 실현은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사회문화적 근거 아래 구성원 전체의 기억과 쟁점, 삶의 맥락을 수용해 새로운 모더니티(Modernity)를 창출할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그러기 위해선 공론의 과정이 요구되고, 이는 수잔 레이시(Suzanne Lacy)가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에서 언급한 미술의 사회적 성찰과 공공의 실제적 참여, 미술을 통한 탈근대적 공론과 결이 같다.
2. 한국에서의 공공미술은 국민세금이 투입되는 관 주도형이 많다.
‘건축물미술작품제도’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제도는 1만㎡ 이상 건축물을 신축 및 증축할 경우 건축비용의 0.7% 이하를 반드시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는 게 요지다. 민간 건축주들도 예외는 아니다. 싫든 좋든 미술품을 설치해야 준공검사를 받을 수 있다.
건축물에 억지로 예술작품을 설치하도록 한 이 기이한 제도는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당시 권장사항으로 출발해, 1995년 의무화됐다. 작가들의 생존권 보장 및 일자리 창출을 통한 민생고 해결,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과 도시환경 개선을 구실로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제도로 인해 지역마다 도시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조형물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도시흉물의 주범이다.(결국 논란 끝에 이전하게 된 세종청사 ‘저승사자’ 조형물 <신명나는 우리가락>을 생각하면 쉽다.) 작가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시효를 다한, 공공미술의 의미를 왜곡하는 ‘악법’으로 꼽힌다.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이유이다.
국민세금이 남용되는 공공미술은 지자체에서도 흔하다. ‘지역 상징 조형물’도 그 중 하나이다.
지역 상징 조형물은 건축물미술작품제도와는 상관없다. 반드시 설치할 의무가 없다. 그럼에도 지자체들이 상징 조형물 건립에 혈안인 데에는 자치단체장의 임기 중 성과주의와 근거 없는 경제 진흥 낙관론이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의 인프라 구축 없이 조형물만 세우면 관광·홍보·경제 활성화가 절로 될 거라 믿는다는 것이다. 눈에 띄니 뭔가 그럴싸하게도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은 무관심의 대상으로 남는다. 2016년 약 7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세운 경북 군위군의 ‘대추화장실’이나 강원도 고성군의 15억 원짜리 ‘항아리 조형물 겸 건축물’, 밥도 못 짓는 괴산군의 ‘대형 무쇠 솥’(약 5억 원), 서울 삼성동의 ‘싸이 말춤 조형물’(4억 원), 성의 상품화라는 논란에 휩싸인 강원 인제군 소양강 둔치의 황금 ‘마릴린 먼로 동상’(5500만 원) 등이 주요 사례이다.
이 밖에도 인천의 ‘새우 타워’(10억 원), 전북 고창군의 ‘주꾸미 미끄럼틀’(약 5억 원) 등도 예외는 아니다. 모두 내 돈이라면 저랬을까 싶은, 공공미술을 빙자해 혈세를 낭비하는 ‘악명’ 자자한 것들이다.
3. 최근 ‘악명’을 떨치고 있는 공공미술프로젝트 중에는 정부 사업도 있다.
바로 문체부와 전국 228개 지자체가 함께 진행 중인 ‘우리 동네 미술’이다. 세금만 무려 약 1000억 원이 사용됐다. 사업 종료는 올해 2월이다.(2월 현재 종료 예정이었으나 일부 지자체의 경우 5월까지 사업기간을 연장한 상태다.)
문체부가 지난해 7월(문체부는 5월부터 준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건 내부적인 단계일 뿐 공표는 그 이후이다.)부터 ‘예술 뉴딜’의 일환으로 시행 중인 ‘우리 동네 미술’*은 공공미술에 대한 몰이해와 행정중심의 성과에만 치중한 ‘정부 공식 졸속 프로젝트’이다. 공공미술에 있어 문제시되는 부분만을 골라 보여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탓이다.
실제 ‘우리 동네 미술’은 공공미술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전시되는 미술과 무엇이 어떻게 왜 달라야만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역 간, 사람 간에 놓인 경계를 허물고 단절을 연결로, 불평등을 평등으로 갈등을 화합으로 만드는 힘을 지닌 것이 공공미술이지만, ‘우리 동네 미술’이 드러낸 현실은 그 반대다. 지역 예술인 및 지자체 간 갈등과 불화, 반목이 드물지 않다. 내용도 긍정적이지 못하다. 온 사방에 페인트로 칠하거나 조악하기 짝이 없는 조형물을 앉히며 공간조성이란 미명 아래 행해지는 예술가들의 인테리어 업자 흉내가 전부이다.
특히 ‘우리 동네 미술’엔 앞서 언급한 공공미술의 네 가지 정의, 즉 주민들이 지역 현안에 대해 자율적?주체적으로 참여 및 발언할 수 있도록 미적 매개가 되어야 할 공공미술의 본령은 들어있지 않다. 대신 국비 집행 기간이나 따지는 행정 중심의 정부와 각 시군 및 구청에서 해야 할 ‘환경미화’ 혹은 ‘시설물 개선’을 공공미술로 여긴 채 호수와 공원, 해변에 수준 낮은 동식물형상을 세워 놓기 바쁜 예술인이 놓여 있다. 이들은 공공미술이 뭔지도 모른 채 지금도 관광인프라 조성을 명분으로 포토 존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4. 코로나19로 힘든 예술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젝트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동네 미술’은 지나치게 서두른 감이 있다.
일례로 본래 10억 원대였던 예산은 지난해 6월 추경으로 700억 원대로 대폭 증액 편성되었고, 두어 달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이후의 과정도 속전속결**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공의 요구에 공공적 가치를 지닌 미술로 부응하는 방법은 애초 존재할 수가 없었다. 참여 희망 예술인들은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정서를 반영한 공공성과 장소성, 환경에 맞는 프로그램의 적절성 등에 관한 연구조차 불가능했다. 공공의 장에서 미술을 매개로 대중과 현대미술, 시대적 사안에 대해 논하는 건 그야말로 언감생심.
부족한 시간은 터무니없는 기획안(제안서)을 양산했다. 비교적 빠르고 손쉬운 동상을 비롯한 조악하고 장식적인 조형물을 세우거나 벽화를 그리며, 단순한 대중적 유희에 초점을 맞춘 ‘유원지형’ 프로그램이 그렇다. 물론 일부 커뮤니티 프로그램도 있다. 하지만 주민을 주체로 한 참여형 기획이라기 보단 예술인들에 의한 계도성 작업으로 변질된 것들이 훨씬 많다. 대부분 공공미술의 핵심인 ‘주민에 의한 이슈 발굴 및 새로운 모더니티 생성’은 기대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이런 상황은 인프라 열악한 시군 단위에 이르면 더욱 안 좋다. 이에 일부에선 심의 위원을 겸한 자문 위원을 공모하는 등, 수준 제고를 위한 나름의 방법을 고민했다. 문체부도 전문가들을 위촉하여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실효성은 약했다. 정작 공공미술 전문가들은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쟁구조의 지자체 응모방식을 꺼려했고, 누가 공공미술 전문가인지 구분 못하는 지자체에선 공공미술과 무관한 지역 인사나 외부인들을 선착순으로 앉혔다. 개중엔 공공미술 관련 이력 없는 지역 작가나 인터넷 정보업체의 대표도 있다.
문체부의 전문가 자문도 형식에 그쳤다. 지자체 사업들을 시도별 구분하여 열람케 했지만 자문의견이 현장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는 불명확했다. 더구나 이미 대부분 자문 시기를 놓쳐 의견자체가 의미 없는 경우도 흔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사업종료시한을 앞두고 있다. 막대한 국고를 투입하며 근사한 예술가 일자리를 꿈꿨던 ‘우리 동네 미술’은 질서 없이 우왕좌왕하다 논란만 남긴 채 퇴장을 기다리고 있다.
5. 미술을 통한 사회적 이슈에의 개입과 탈근대적 공론화, 새로운 모더니티의 창출은 ‘건축물미술작품제도’ 및 혈안이 되어 추진하는 지자체의 ‘상징조형물’, 문체부의 ‘우리 동네 미술’에서 드러난 결과인 조형물 홍수에 비하면 무척이나 까다롭다.
사람마다 미적 가치 기준이 다르고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작가주의 관점과 공공성의 절충 역시 완만해야 하므로 일정한 성과로까지 이러진다는 건 생각보다 지난한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측면으로 인해 동시대 공공미술의 가치는 더욱 빛날 수 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예술적 철학과 감수성을 발견토록 하는 문화적 창 혹은 무대로의 전환을 유도할 수 있는데다 상상력의 확장 및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상상력과 사고의 지평 확장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생성한다. 보다 기름진 미래로의 도약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공공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루하다. 기껏해야 ‘건축 속의 미술’과 ‘공공공간 속의 미술’****로 이해한다. 여기저기 조각 작품을 세우거나 수용자들이 조각 작품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것, 또는 붓을 쥐고선 시민들이 예술가와 같이 벽화를 그리면 그것이 곧 공공미술이요 지역 문화공동체의 예술적 실현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작업을 공공공간으로 옮기는 것을 공공미술로 오해하는 작가들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공공미술은 보편적 미적 질서나 전체로서의 공중이 아닌 살아있는 수많은 다른 공중과 그들의 다른 감수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공공미술과 공공성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고 개입하여 유익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공공미술의 방향이다. 적어도 ‘우리 동네 미술’처럼 개념 없이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사업은 공공미술이 아니다. 지향점과 방향, 성과 면에서 아무 상관없다.
어쨌든 곧 결과물 공개를 목적엔 둔 ‘우리 동네 미술’. 단언컨대 코로나19로 인해 시급했던 상황을 애써 고려하더라도 머릿수 채우기에 급급한 근시안적이고 급조된 정책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세금은 세금대로 쓰고 시민과 예술인들에겐 별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지역 미술인들 간의 갈등과 반목, ‘조형물 천국’과 같이 긍정적인 것보단 부정적인 측면이 더욱 강한 역대 최고의 예술가 일자리 지원 사업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최고의 기념비적 졸속 프로젝트로 기록될 것이 자명하다.
*‘우리 동네 미술’은 코로나19로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예술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주민 문화향유 기회 제공을 위한 ‘한국판 뉴딜 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이른바 ‘예술 뉴딜’이다. 총예산은 국비와 지자체 매칭 포함 약 1000억 원이다. 시군별 약 4억 원이 할당됐다. 사업 기간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2월까지로 계획되었지만 일부 지자체의 경우 5월로 연기됐다.
**일례로 프로젝트 참여를 희망하는 작가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1~2주 남짓 한 시간에 기획서를 작성해 제출해야 했다. 공모와 접수 기간을 합쳐도 1주일이 채 되지 않는 지자체도 많았다. 주관 기관 또한 기획안 작성부터 교부 신청까지 한 달 내외의 시간 내 끝내야 했다. 전체 사업기간은 대략 6개월 정도이지만, 정산기간을 제외한 실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3개월 남짓에 머문다.
***작가들은 사업자체를 그저 일회성 공공근로쯤으로 여겼고, 공공의 주체인 시민들은 배제됐다. 프로젝트를 떠맡은 지자체 주관 기관들은 갑작스러운 하달식 정책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6개월 내 사업을 마무리해야만 하기에 어지간하면 그냥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명연자실하기도 했다.
****건축 속의 미술과 공공 공간 속의 미술은 좋게 말해 ‘건축물 및 공간에 미술을 효과적으로 대입하는 방법’이지만, 거칠게 표현하면 건축물과 공공 공간을 위한 미술의 도구화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건축물과 특정 공간을 ‘장식’한다는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