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를 넘어 – ‘문화도시 지정 사업’을 돌아보며
송교성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실장)
문화예술인들에게 공공기관의 공모를 통한 지원사업(이하 공모사업)은 떼려야 땔 수 없는 그림자 같다. 연말이 되어 사업결과를 정리하고, 정산업무를 하다보면 ‘다시는 지원사업을 신청하지 않겠다.’라며 한숨을 쉬지만, 신년이 되고 활동 계획을 세우다 보면 자연스레 공모사업을 찾아보게 된다. 관련 지원 제도나 기반이 열악하고 민간의 후원이나 유통구조 등 전반적인 생태계가 취약하다보니 적은 지원금의 공모사업도 무시하기 힘들다.
그동안 공모사업이 예술의 창작과 매개, 향유를 지원하고 문화예술 발전에 중요하고 긍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때때로 독이 되는 약으로 작용해왔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많다. 대체로 심사나 평가과정에서의 문제점이나 지역·장르·분야·세대 등의 형평성 문제가 거론된다. 공모사업의 기준에 맞추다 보면 상상력이 제한받거나, 혹은 과도한 행정업무로 인하여 정작 본연의 활동을 저해한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렇다고 한정된 공적 재원을 별도의 기준 없이 분배하거나, 행정 체계 없이 집행도 어렵다. 공모사업의 딜레마다.
민간과 마찬가지로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나 문화재단과 같은 공공기관도 중앙정부가 주관하는 공모사업을 신청한다. 재정이 열악한 지자체의 경우 문화예술 분야는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다. 민간의 공모사업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은 지자체 대상의 공모사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특히 지역불균형 속에서 국비 공모사업 유치를 위해 지자체간의 경쟁 구도가 형성되거나, 이른바 ‘따고 보자’는 식의 접근으로 인하여 공모사업의 본래 목적이 퇴색되거나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 문제점도 지역 곳곳에서 드러난다.
최근 지자체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의 ‘법정 문화도시 지정 사업’을 통해 국비 공모사업의 현황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지정된 도시들이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단계이고, 더군다나 코로나로 인하여 계획된 프로그램조차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는 등 문화도시 사업의 내용에 대해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2018년부터 시작된 공모 추진계획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그 윤곽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어있기 때문에 심사의 형식이나 과정 등 공모방식 자체는 짚어볼 수 있다.
문체부는 지역문화진흥법에 근거하여 2018년부터 “문화를 통한 지속가능한 지역발전 및 지역 주민의 문화적 삶 확산”을 비전으로 문화도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주요한 정책목표를 “지역의 공동체 활성화, 문화를 통한 균형발전,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기반 구축, 사회혁신 제고”*로 설정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 스스로 도시의 문화 환경을 기획·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포괄적으로 예산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2022년까지 4차에 걸쳐 30개의 문화도시를 목표로 지정할 계획이며, 지정되면 5년간 최대 100억(지방비 포함 최대 200억)의 예산이 지원된다.
문화도시는 2년에 걸쳐 심사가 진행된다. 우선 지자체가 계획서를 제출하면 서류검토, 현장실사와 발표 등을 거쳐 예비문화도시를 선정한다. 예비문화도시로 선정된 지역은 1년간의 예비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대한 전문 컨설턴트에 의한 컨설팅 등을 통해 수정 보완된 최종적인 계획안을 발표함으로써 최종 심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2018년 첫 문화도시 모집 공고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2곳의 문화도시(1~2차)와 10곳의 예비문화도시(3차)가 지정되었다. 경쟁률을 살펴보면 1차 문화도시는 총 19개 지자체가 신청, 7개가 최종 선정되었으며, 2차 문화도시는 총 25개 지자체가 신청, 5개의 지자체가 선정되었다. 3차의 경우 41곳이 신청하였고, 현재 10곳이 예비도시로 선정된 상황이다. 경쟁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떨어진 지자체의 재공모를 감안한다면 마지막 4차 문화도시의 경쟁률은 매우 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2월 국제신문은 부산진·수영·북·금정구 등 부산 내에서도 신청하는 지자체가 많을 것으로 보도하였다.
문화도시는 많은 장점과 강점을 지닌 공모사업이다. 무엇보다도 문화예술에 대한 정책적 관점의 변화를 이끌면서 지역 현장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문화도시는 장기적으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의 강화, 문화적 공동체의 활성화, 문화적 도시재생 등 문화를 통한 도시 발전에 중심을 둔다. 각 지자체는 자연스럽게 지역의 고유한 특성, 시민의 참여와 민관 거버넌스의 형성, 도시 전반에 걸친 문화적 활력의 재고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국비 공모사업이 가지는 문제점도 어느 정도 해소하였다. 예컨대 대규모 국비사업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하향식의 관 주도형 계획수립이 아닌 민간 주도가 강조된다. 담당 공무원이 계획을 수립하고 주민 의견을 청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민과 지역의 문화적 주체, 유관 분야의 전문가 그룹이 거버넌스를 형성하고, 의견을 수렴하여 상향식으로 계획을 수립한다. 지자체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도시재생, 교육, 복지 등 문화와 관계되는 유관부서와의 칸막이를 허물고, 도시발전과 유기적으로 연계될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실제적인 민관 협치가 중요한 것이다.
한편으로 대부분의 국비 공모사업에서 나타나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지역의 사정에 맞지 않는, 중앙정부의 일률적인 사업방향과 방식, 내용이 지역에 그대로 적용될 때이다. 그런데 문화도시의 경우 2년에 걸친 다양한 방식의 심사과정과 민간 전문가들에 의한 컨설팅 등을 통해 전문성을 높이고, 지역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게끔 구조가 설계되어 있다. 이외에도 지역의 문화적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마련해 두고 있는 점도 문화도시 공모방식의 강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점과 강점들이 때때로 딜레마처럼 공모과정 속에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보기 드물게 상당히 큰 예산을, 장기적으로 지원한다는 매력이 크다보니 지역 간에 과도하게 경쟁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물론 한정된 예산을 여러 곳에 나눠주기 보다는 집중해서 실효성 있게 예산을 투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서울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예산과 자원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구조 속에서, 문화도시는 지역이 피하기 어려운 필연적인 선택지다. 재정자립도가 약하고, 환경이 열악한 지자체로써는 문화도시 선정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공모사업 자체가 2022년까지 기한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지역 간 경쟁이 치열함을 넘어 과열되는 양상이다.
2년에 걸친 오랜 심사기간과 컨설팅, 예비사업 또한 장점이면서 동시에 지역 현장에 상당한 부담이다.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면서 피로감이 누적되고, 세부적인 계획까지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다 보니 오히려 현장의 특성이 제한된다는 의견도 더러 나타난다.
한 편, 계획수립이나 추진기구의 설치, 예비도시사업을 통해 지역에 내재된 문화적 가치를 끌어내고,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기기도 하지만, 수 천 만원에서 몇 억에 이르는 사업비용을 온전히 지자체가 감당해야 해서, 선정에 대한 부담감은 배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공모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담당 공무원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받는 압박감이 높다. 연말 심사 시기에 이르면 SNS에 담당자들의 넋두리와 긴장감이 여기저기서 전해진다. 탈락한 지역에 ‘과정 자체가 문화도시입니다.’라고 위로하기에는 지자체가 감당해야할 출혈이 상당하다.
한편, 기초지자체가 신청단위이기 때문에 광역자치단체의 역할이 거의 없다는 점도 고민해야할 지점이다. 타 분야에 비해 문화예술 사업이 전개될 때는 기초 단위의 행정구역이 큰 의미를 가지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융복합과 네트워크가 강조되면서 문화예술 사업의 범위도 광역화되고, 예술가의 교류나 주요 장소 활용 등 인접한 지역 간의 협력도 중요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 광역자치단체의 기획과 조정 역할이 중요하지만, 현재 문화도시 공모과정 속에서 광역자치단체의 역할은 제한적이거나 예산 매칭 정도의 보조적 지원에 불과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지역분권을 약화시키는 측면도 있다.
이미 공모단계가 막바지에 이른 현 시점에서 변화는 사실상 어렵지만,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문화도시 지정 사업은 계속될 필요가 있고, 그러한 경우 개선방안으로써 광역자치단체의 역할 강화를 고려해볼 수 있다. 예컨대 광역자치단체가 조정 역할과 일정 정도의 예산을 보조하면서 2~3개의 기초 지자체가 연계하여 공동으로 신청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예비문화도시를 광역단위에서 선정하면서 경쟁 구도를 다소 완화하고 비용을 줄이는 방향도 모색할 수 있다. 나아가 중앙정부는 포괄적으로 가이드라인만 제시하고, 광역자치단체로 문화도시 지정 권한과 예산을 이관하는 방안도 장기적으로는 고려해볼 수 있다.
현재까지 문화도시 지정 사업은 국비 공모사업의 진일보한 방식을 보여주면서, 의미 있는 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향후 공모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나 평가를 통해 국비 공모사업의 좋은 모델 정립을 기대해본다.
* 문화체육관광부. 2020년 문화도시 추진 가이드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