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분권
이청산(한국민예총 이사장)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7일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방안’을 발표했다. 4월 고 이건희 삼성회장의 유족이 문화재와 미술품 총 23,181점(국립중앙박물관 21,693점, 국립현대미술관 1,488점)을 기증한 이후, 문체부는 별도 전담팀과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를 운영해 왔으며, 총 10차례 논의를 거쳐 기증품 활용에 대한 원칙을 정립하고 단계별 활용방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위원회가 정한 기본 원칙은 ① 국민의 문화향유기회 확대를 위한 국가기증의 취지 존중과 기증의 가치 확산 ② 문화적 융·복합성에 기초한 창의성 구현 ③ 전문 인력 및 국내외 박물관과의 협력 확장성 ④ 문화적·산업적 가치 창출을 통한 문화강국 이미지 강화이다. 그리고 결국 서울의 용산과 송현동 두 공간에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소장품관(약칭 : 이건희 기증관)’건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위원회가 정한 첫 번째 원칙인 국민의 문화향유기회의 확대도 이러한 측면에서 우선시 소장품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두 가지 지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일명 이건희 컬렉션의 유치를 위하여 많은 지방정부가 과열경쟁을 했다. 위원회가 정한 첫 번째 원칙인 국민의 문화향유기회의 확대도 이러한 측면에서 우선시 되었다고 여긴다. 한국은 도시전체를 새로이 만든, 빌바오 효과를 얘기한 스페인처럼 넓고 광활한 국가가 아니며, 전국이 3시간이면 어디든지 도달할 수 있는 교통망을 가진 국가이다. 역으로 수도권에 많은 국민이 산다고 문화를 수도권에 집중하여 수치적으로는 그럴지 모르나 문화향유기회가 더 확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향유는 균형발전를 동반하여야 한다는 논리는 작은 나라를 더 작게 만들고 있는 수도권 집중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한국의 현실에 기반한 주장이다. ‘한국식 빌바오 효과’에 대한 검토가 충분히 필요했다. (빌바오 효과란 문화가 도시에 미치는 영향이나 현상을 뜻한다. 쇠퇴해가던 스페인의 지방공업도시 빌바오가 1997년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시설인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하여 경제적 부흥을 가져온 데서 비롯된 용어이다.) 문화향유의 균형발전이 바로 ‘한국식 빌바오 효과’일 것이다. 이 문제는 총 10차례의 회의를 통하여 쉽게 결정될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식 빌바오 효과’를 염두에 둔다면 한국 어느 곳에 ‘이건희 기증관’을 두어도 우리 국민들 모두는 충분히 문화향유기회를 확대하여 누릴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과 유기적인 협력체계 역시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핑계로 들린다. 결국 보다 담대한 논의를 통하여 문화분권과 수도권 집중의 현실을 타파하는 결과가 나와야 했다. 두 번째 아쉬운 점은 명칭의 문제이다. 왜 새로이 설립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이건희 기증관’으로 한정하는지 의문이다. 마치 국내 최대 기업에게 찬사를 보내기 위함 같다. 이건희 회장 유족의 큰 결정을 존중하고 환영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좋은 계기가 되어 많은 이들의 국가기증으로 이어지는 것을 바란다면, ‘이건희 기증관’이라 명명할 것이 아니라 신축 국립현대미술관의 내용에 담겨야 할 문제다. 이후 이어질 국가기증의 수용을 염두에 두어도 그렇다. 또한 재벌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비판을 감안할 때 국민정서에 부합하지 않을 우려가 크다고 본다.
이것은 정부가 문화정책부재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일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자치입법, 자치행정, 자치재정, 자치복지 등 네 가지 부분에서 긍정적인 개헌 조치를 하는 것이 우선적 고려 사항이라고 강조하면서 지방분권을 통한 국가 균형발전이야말로 수도권과 지방이 상생하는 길이고 국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게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헌법 제117조에서는 법령의 범위 내에서만 조례를 제정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고 지방자치의 입법권, 재정권, 조직권 등은 국회와 중앙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취임초의 공언대로 개헌이 되지 않는다면 지방분권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2013년 말 국회에서 지역문화진흥법이라는 매우 의미 있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지역문화진흥법은 지역의 특수성을 인정하겠다는 것이 기본계획의 골자이다. 그리고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실현가능을 높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지역문화 자치와 지역문화 분권이다. 국가가 자유경쟁시장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간섭한다면 지역 간 불균형현상 해소는 영속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대안이 ‘지방 분권’이다. 지역주민이 도시의 운영주체가 되는 것이 지방자치이고 지방자치가 실행되는 도시가 미래도시의 모델이다.
다시 말해 지역문화진흥법 제정의 의미는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기초적인 제도의 보완과 문화 분권, 지역문화의 자율성 강조 등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체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추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실현가능을 높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문화자치와 문화분권이라는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다.
문화자치와 문화분권은 과연 가능한 일이고 또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핵심적 가치이자 지향점으로 등장하고 있는 문화자치와 문화분권이라는 개념 중 지역문화진흥법 등을 통해서 지역에 핵심적인 가치와 특성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자치로의 이행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의 문화적 자생력과 자율성을 권리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분권은 여러 가지 난제를 가지고 있다. 문화분권의 최우선 목표는 지역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이는데 맞춰져야 한다. 이를 위해 지자체는 민간기구와의 협치 에 힘을 쏟아야 한다. 관주도의 문화정책은 한계가 있다. 또한 문화분권의 경우, 현재처럼 중앙정부에서 독점하고 있는 문화정책에 대한 다양한 권한과 문화사업의 추진에 필요한 재정 및 집행권한 등을 지방정부에 단계적으로 이양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문화분권은 말 그대로 헛구호로 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지역적인 관점에서 냉정하게 바라볼 때 중앙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지방정부로의 권한 이양은 내우 요원한 것으로 판단되며 설령 이양이 된다 하더라도 매우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럼에도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문화분권은 문화자치와 더불어 다양한 지역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핵심적인 가치이자 지향점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전제조건이자 필수조건이다.
문체부의 위상과 역할 재구성, 산하 기관들의 통합도 필수이다. 문체부는 국가 문화행정의 컨트롤 타워이자 플랫폼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기관이고, 직접 사업은 산하 기관과 지역으로 이관해야 한다. 문체부와 광역문화재단간 새로운 관계 설정도 요구된다. 수직적인 사업 전달 방식이 아닌 다원적이고 자율적인 지역문화정책 수립과 집행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보충성의 원리에 기반한 문화 분권’, ‘지역의 자율과 책임’등의 기본원칙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지역 간 경쟁과 갈등을 조장하는 공모방식을 지양하고 협력의 관점에서 지역이양 사업을 대폭확대, 광역 단위의 정책 수립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지역 분권과 균형발전’을 위한 문화 분야 국정과제로 ‘지역과 일상에서 문화를 누리는 생활문화시대’를 선정하고 지역문화 및 생활문화 진흥을 핵심과제로 추진한다고 하지만 그런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올바른 지역문화의 정착은 지방분권의 큰 틀 속에서 ‘문화분권’ 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국민 개인이 주체적으로 지역 공동체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국민이 문화 예술 향유의 대상에서 문화 예술 창조의 주체로 거듭나는 문화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 지역이 스스로 지역 문화 예술이 주체가 될 때만이 지속적인 지역 문화와 예술이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지방은 여러 가지의 문제를 심각하게 가지고 있다. 인구감소, 고령화, 학령인구 급감 등으로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방자치와 분권은 거스를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모든 국민이 인식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자치단체들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 의료진과 자원봉사자의 헌신, 성숙한 시민의식 등 지방자치와 분권의 필요성 및 당위성을 재차 확인했다. 지역 문제를 주민 스스로 해결하며 책임지는 문화가 바로 지방자치와 분권이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핵심 가치다. 지방자치와 분권에 역행하는 중앙집권적 국정운영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지역과 세대는 물론 계층에서 나타나는 다양하고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방정부의 창의성을 약화시키며 주민 참여와 의지에 의한 지방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헌법 전문은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라고 규정하며 헌법 제9조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등 다양한 문화진흥조항을 규정하고 있다.
문화국가원리에 입각한 현대국가는 문화의 자율성 존중과 문화의 개방성, 다양성, 존중이라는 책무를 부여받고 있다. 이러한 문화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문화예술의 진흥과 지역문화 균형발전이 중요하다.
문화적 중앙과 문화적 지방의 해소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는 문화의 균점과 지역문화의 자율성 확립이 중요하다. 전자는 지역 간에 있어서의 문화격차를 해소하고 평균적 수준의 문화를 지역에서 균점하며 국내적인 균형을 보장하는 것이고 후자는 각 지역에서 독자성을 가진 문화를 창조하며 국내에 있어서의 문화다양성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곧 지역문화의 진흥이자 문화 분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지역의 문화정책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그 이전에는 국가 사회 통합적 관점에서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 문화예술활동의 진작 문화 복지의 증진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는 이전보다 지역문화에 대한 다양한 정책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고, 지역의 문화예산이 계속적으로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문화의 자율성과 다양성의 확보도 점진적으로 진전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문화자원, 문화생산, 문화소비 등이 중앙에 집중되어 중앙과 지방의 문화격차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지역별로 특색 있는 고유의 문화적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문화의 중앙 집중을 분산시키고 지역 간 문화격차를 해소하며 지역별 특색 있는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분권화의 노력이 문화 분권이다. 지방자치단체 출자 출연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제33조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는 출자 출연기관의 자율적인 운영을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와 예술의 분리와 더불어 문화예술지원기관의전문성과 직격되어 있는 문제로 정부나 지자체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를 방지하여 지역문화재단의 존재 의의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역문화재단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하부기관 산하기관 사업대행기관이 아니다. 시대와 시민의 요구에 의해 시민이 재물을 모아 자율적 독립적으로 예술을 지원하도록 설립한 재단법인이다. 문화재단 또한 ‘예술가는 불가능한 것을 제시하는 사람이고, 행정가는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처럼 문화재단이 본연의 모습을 찾아 이런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행정이라는 이름의 관행의 굴레 갇혀 가능도 불가능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예술의 가능성마저 행정의 편의성으로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지점이 있다.
자신의 창의성으로 작품을 만드는 건 오롯이 예술인의 몫이지만, 예술인으로서 당당하게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건 사회의 몫이 아닐까. 그 몫을 문체부와 문화재단이 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