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자율성에서 참고하는, 네트워크 시대 문화기관의 자율성
김해보(서울문화재단 예술교육본부장,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 겸임교수)
팔 길이 신화에 기대지 말고 다른 접근으로 인식 확장 필요
문화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 하면 의례히 거론되는 “팔 길이 원칙”은 신화입니다. Hutchison(1982)의 “팔길이 원칙은 20세기 중반 영국의 정치구조 하에서 탄생한 전형적인 영국식 타협물이었다”(김정수, 2019 재인용)*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제도는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 맥락 위에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균형 상태입니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팔 길이 원칙”이 당시 문화기관과 정치 사이의 균형, 즉 제도로서 의미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다른 사회 맥락 위에서 인용될 때 그것은 그저 참고할 개념적 설명 또는 수사적 표현 정도로만 생각하는 게 낫습니다. 최근 “지역문화예술교육 기반구축” 사업을 비롯한 국비매칭 사업의 지방이양 과정에서 다시 한번 재정적 자치 없는 분권의 딜레마가 확인되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지자체 산하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 논쟁은 담당 직원 개인의 업무스타일에서 정책실행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엮여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저런 신화 같은 표현에 매달려서 해결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문화정책 안에서 쳇바퀴 도는 “주장”보다는 다른 영역에서의 수혈을 통해 인식을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제도가 성립되고 이식되는 사회적 공간의 맥락 차이에서 한발 더 나가 보겠습니다. 경제학자 케인즈가 영국 예술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을 맡았던 때는 2차 세계대전 후 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동원할 “예술”을 정책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문화정책이 다루어야 할 영역이 말 그대로 “문화”라는 사회전반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기술 발전으로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 주체들이 존재하고 작동하는 방식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럼 그 주체들의 자율성이라는 것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공지능이 자율적 행위자로 인정받으려면
“자율성”은 로봇, 자율주행자동차 등 인공지능 주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심지어 법적 책임을 지울 수 있는가를 다루는 논의에서도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특히 강한 인공지능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에서 인간 조직의 자율성 개념을 재정립하는데 참조할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김진석 교수는 “강한 인공지능과 인간”(2019, 글항아리)에서 이제 인간중심주의에서 빠져나와서 비인간을 포함한 새로운 행위주체들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관점 변화는 오히려 인간의 수준으로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보다는 인터넷으로 만물이 연결되는 네트워크화 때문에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김진석 교수는 “각종 기능들이 분화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 시스템 이론 관점에서 보면 사회 시스템에는 단일한 중심도 없고 단일한 주변도 없다. 책임은 점점 익명적인 대행자들에 의해 대행된다. 이제 오히려 행위자-네트워크란 개념에서 네트워크 자체가 일종의 행위자이다”(위의 책 p.249~250)는 진단과 함께 사이버행위자의 자율성에 대해 논의합니다. 이렇게 연결된 네트워크 사회에서 사이버 행위자들의 자율성이란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를 가진 독립 주체가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자기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것일까요? 이 책에서는 사이버네틱스 이론, 루만(Niklas Luhmann)의 사회시스템 이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들을 엮어서, “자기 조직적(self-organizing)” 사회적 시스템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상태에서 어떤 자율적인 주체로서 행위하게 되는지를 예측합니다. 1차적인 결론은 “사회적 네트워크와의 연결 속에서 사회적 시스템으로 기능해야 ‘자율적’ 행위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위의 책 p.272)
“의식”보다는 “지능”이 요구되는 네트워크 위에서의 “작동의 자율성” 보다는 “자원확보 능력”?
‘시스템’ 상의 행위자가 된 독립주체는 그의 도덕적이고 고유한 ‘의식’ 보다는 연결된 네트워크 위에서의 실행능력으로서 ‘지능’이 더 중요해진답니다. 루만은 복잡하게 분화된 “자기 조직적(self-organizing)” 사회적 시스템들이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 주며, 그런 환경에 대해서 “닫혀있으면서 열려있는” 방식으로 “작동의 자율성”이 확보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진석 교수는 “루만이 힘과 권력의 위계질서라는 전통적 틀에서 벗어나 시스템의 ‘작동적 자율성’을 호소하면서 인간적인 행위자의 권위를 극복하기는 했지만, 시스템의 재귀적 자기조직의 이면인 시스템의 폐쇄성을 해결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합니다(위의 책 p.261). 자율성을 주장하면서도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기관들에게 뜨끔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인간중심적인 “작동의 자율성이 아니라 환경에 최소한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또는 환경에 최대한으로 영향을 주면서 자신의 이익이나 생존을 위해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는 여지나 독립성으로서 자율성”이 강한 인공지능 같은 사이버행위자까지 확대 적용할 자율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리적·영토적·심리적·경제적·정치적 힘을 갖는 다는 의미의 자율성, 작동에 필요한 자원을 스스로 확보할 수 있는 힘 같은 것”이라고도 말합니다.(위의 책 p.263)
분권을 명분으로 국가의 책임을 분산 대행하는 네트워크 위의 행위자?
이 논점들을 지역 문화기관들의 자율성에 대비시켜 봅시다. 주체들이 네트워크로 엮이고 분산된 책임의 대행자가 되고, 오히려 네트워크 자체가 중요한 행위의 주체가 되는 현상은 문화정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문화진흥이라는 책임은 지역문화진흥과 분권이라는 명분으로 지자체나 그 산하 문화기관들까지 연결된 문화행정의 네트워크를 통해 대행됩니다. 문화정책의 네트워크는 특히 분권, 주체들의 자율성을 강조하지만, 네트워크의 본질이 그와 반대 현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분산된 독립 주체들은 이런 네트워크화된 시스템에 접속하지 않고는 활동에 필요한 자원을 획득 할 수 없으므로 네트워크 상의 행위자로 들어올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주체는 네트워크 상의 데이터로 존재하게 되고, 제어하는 것은 더욱 쉬워집니다. 네트워크 시대가 분권화된, 단일 중심이 없어진 시대라고 하지만 오히려 연결된 주체들을 어딘가로 쏠리게 하는 강한 통제가 쉬워집니다. 네트워크를 만든 주체가 중앙집중적 통제하겠다는 의도가 없었더라도, 연결된 네트워크 위에서 자원 배분이 특정 의도에 따라 이루어지면 그 의도를 중심으로 주체들이 흔들리게 됩니다. 각자 “자율적으로 작동”하더라도, 지역까지 전달되는 문화행정시스템을 통해서는 문화부의 정책목표를 중심으로, 국고보조금 관리시스템을 통해서는 기재부의 투명한 공공재원관리라는 의도를 중심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고, 지금에야 벌어지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일례로 2005년에 런던에 있는 영국아츠카운슬(ACE) 본부와 뉴캐슬에 있는 북동부지부(ACE-NorthEast)를 방문했을 때, 두 곳 담당자들의 입장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런던의 직원은 당시 전국적인 개편으로 권역별 위원회에 대한 지원은 많아지고 권한이 이양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북동부지부의 직원은 아츠카운슬 홈페이지와 온라인 보조금관리시스템만으로도 전국에 흩어져있지만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꼼짝없이 관리되는, 매우 강한 중앙집중화가 벌어졌다고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개편을 받아들인 이유는 줄어드는 돈 때문이었지요. 결국 자원을 구하기 위해 네트워크로 들어온 주체들은 어떤 “의도”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주체의 과업을 “대행”하느라 어디론가로 쏠리게 됩니다. 김진석 교수의 말대로, 자원을 얻어 대행하는 과정에서는 고유한 판단을 위한 “의식” 보다는 대행해야 할 과제를 잘 실행하는 “지능”이 중요해집니다. 문화기관들이 더 많은 자원을 배분 받으려면 경영평가에서 높은 득점을 보장하는 행정수행 “지능”이 발달해야 합니다.
이글의 요지는 이런 현상을 거부하거나 투덜대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현상은 연결되는 사회시스템 안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화기관이 필요한 자원이 그 네트워크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중 팔길이 원칙(double arm’s-length principle)”(Chartrand and McCaughey 1989, 김정수 2018 재인용)에 따라 소위 관리감독 기관으로부터도, 예술계로부터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 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확보될까요? 모두가 연결된 시대에 연결을 끊는다고 자율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화기관이 “자율적 주체”이기를 포기하고 주체들이 흔들리는 “영역”이 된다면...
지자체 산하 문화기관들은 중앙에서 지역까지 일사분란하게 갖추어진 문화서비스 전달체계라는 시스템 망 위에서의 “작동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분권이라는 명분으로 분배된 자원을 활용한 실행의 “지능”을 잘 갖추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고 지역문화재단이 공공자원의 수도꼭지를 마음대로 틀 수 있는 자율성에 필요한 “물리적·영토적·심리적·경제적·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실의에 빠져있어야만 할까요? 인간이나 사이버행위자의 경우, 김진석 교수는 그런 자율성 조차 “소셜 네트워킹이나 사회시스템에 의해 대행되고 거의 대체”되는 초연결, 인공지능 문명 시대에, “자율성보다 중요한 것은 촘촘하고도 유연하게 연결된 연결망 속에서 같이 흘러가고 같이 멈추고 출렁이는 일이다”(위의 책 p.273)고 말합니다. 이 우울하지만 적절한 전망을 문화기관에 적용해보는 것도 한 방편일 것 같습니다.
문화기관이 네트워크의 망을 강하게 흔들 “힘”이 있는 “자율적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고, 오히려 자율적인 주체들이 자원을 찾아와 매달리고 흔들리는 “네트워크의 망”이 되면 어떨까요? 문화기관은 더 큰 네트워크 위에서 연결되는 다른 (폐쇄적이면서 열리는) 시스템들(예를 들어 지자체의 문화부서)에 대비하여 더 큰 “영향력” 또는 자율성을 가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루만처럼 힘이라는 것에 대한 낡은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문화기관의 자율성은 그와 연결될 지역의 문화주체들이 자원을 얻어가는 네트워크, 다시 말해 “정책의 영역을 만드는 힘”으로 쓰여야 합니다. 또 거기서 문화기관의 자율성이라는 힘 또는 영향력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예술교육을 예로 들면, 문화재단이 코로나 이후 다양한 영역에서의 회복 프로젝트의 네트워크 망을 만들고 그 위로 예술단체들이 자원을 찾아와서 흔들리고 그 흔들림을 따라 (공공자원이든 기업의 기부든) 외부자원들이 유입되는 상태에서 문화재단은 자율성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네트워크 망을 국가나 지자체가 먼저 만들면 우리는 그 위에서 각자의 의지에 따라 적절히 흔들리는 “작동의 자율성”에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지능”이 아닌 “의식”을 가진 전문가 집단으로 존중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가진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자율성을 존중받으려면...
전문가 집단의 자존감 위에서 네트워크 시대의 자율성을 주장한다면, 사이버행위자와 인간을 구별하지 않는 김진석 교수의 전망을 따르지 않고, 넘쳐나는 비인간 행위자들 사이에서 인간의 권위를 지켜준 루만의 논리에 따르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실행의 “지능”과 다른 “의식”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 개인의 의식을 조직에 대응한다면 그것은 조직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화의 본질적(intrinsic) 가치와 활용적(instrumental) 가치 외에 “제도적(institutional) 가치”까지 고려한 존 홀던의 논의** 속에서나 그 가치를 인정받습니다.인간이 의식을 가진 자율적 주체이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로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은 인권 관점에서는 수용되는 주장입니다. 저도 어떤 맥락에서는 예술의 본질적 가치나 활용적 가치 이외에 예술가의 존재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기관이 그 사회의 제도로서 존재하는 사실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지지받기가 무척 힘들 것입니다. 기관은 지속적으로 그 존재 가치를 만들어내고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인간의 존재적 가치의 근거가 되는 “의식”은 바로 조직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철학은 주장이 아니고 통찰입니다. 변화하는 동시대 사회의 요구와 균형을 이루는 제도로서, 존재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조직의 철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기관만이 “의식을 가진 주체로서의 자율성”을 지지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팔길이 원칙’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 문화정책의 진정한 금과옥조인가? (김정수, 한국정책학회보, 2018)
** “Cultural Value and the Crisis of Legitimacy: Why Culture Needs a Democratic Mandate” (John Holden,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