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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람] 부울경 문화공동체, 어떻게 가능할까?

발행일2022-04 발행처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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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울경 문화공동체, 어떻게 가능할까?

김태훈(작가, 지역스토리텔링연구소장)


지난 4월 19일 대한민국에서 인구 800만 명의 ‘부울경 특별연합’이라는 전대미문의 메가시티가 탄생했다.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2019년말 "권역별 메가시티로 수도권 공화국을 극복하자”고 주장한지 3년 째 되는 해에 일궈낸 구체적인 성과다. ‘지방소멸’이란 말이 등장한 것은 2014년이다. 일본에서 발표된 ‘마스다 보고서’가 출처인데, 그는 2040년까지 인구소멸 가능성이 높은 기초단체 869곳(전체 1,741곳)을 꼽았다. 마스다는 “도쿄로 집중되는 극점사회는 인구의 블랙홀이 되어 결국 전체 인구가 급감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이런 일본의 수도권 인구 비중은 35.2%(2020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50.2%(2020년)보다 15%나 적다. 그만큼 대한민국 상황이 심각하고, 그래서 메가시티 정책은 특단의 대책인 동시에 궁여지책인 측면도 없지 않다.


문화정체성의 기본, 스토리 공동체
메가시티의 기본 개념은 ‘또 하나의 수도권’이다. 부산을 서울 삼고 울산을 인천 삼고 경남을 경기 삼는 일종의 미러링 전략으로, 수도권 못지 않은 중력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관건은 중력을 일으킬 구심점이다. 행정력을 발동하기 위한 구심점은 이번에 만들어졌다. 경제력을 일으키기 위한 구심점은 부울경 전역에 포진하고 있는 산업기지들을 잘 조직하고 혁신하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문화력, 즉 소프트파워다. ‘우리는 한 지역’이라는 정서적 공감대, 문화적인 정체성을 과연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가능할까?

 

당장 메가시티를 부르는 이름부터 지역마다 다르다. 부산은 ‘부울경’, 울산은 ‘울부경’, 경남은 ‘경부울’이라고 한다. 서울과 수도권은, 헌법재판소가 관습법 개념을 꺼내들 정도로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서울 중심의 ‘기억 자산’이 존재하지만, 부울경 지역은 깨끗한 백지와 다를 바가 없다. 길게 보되 흐트러지지 않을 통합의 방향성이 절실하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은 2월 28일 영국언론 <가디언>에 “푸틴은 왜 이미 전쟁에서 지고 있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거기에서 유발 하라리는 푸틴이 전투에선 이길지 몰라도 전쟁에선 패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스토리’ 때문이다. 전쟁과 함께 우크라이나인들은 당장은 물론 수십 년에 걸쳐 미래 세대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다. 전쟁의 공포에도 수도를 떠나지 않는 대통령, 경고하는 러시아 군함에 “꺼져!”를 외치고 장렬하게 전사한 스네이크섬 초병, 맨몸으로 전차의 행진을 막은 시골 할머니 등은 우크라이나가 하나의 나라로 결집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접착제라는 것이다.

 

그는 칼럼에서 “국가는 궁극적으로 이야기를 기반으로 세워진다”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공동체에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 메가시티 또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본은 ‘스토리’일 수밖에 없다. 부울경 메가시티 시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또 가슴 깊이 간직할 공통의 스토리가 과연 얼마나 있을지, 없거나 부족하다면 어떻게 창조해내야 할지 고민하고, 시도하고, 반복해야 한다.

 

사실 연합체를 만들 때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대단한 발견은 아니다. 12년 전 마산, 창원, 진해 등 기초단체 세 곳을 모아 출범한 통합창원시도 공통의 스토리를 만들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당시 시정부는 프로야구단을 유치했고(스포츠), 세종 때 좌상을 지낸 최윤덕 장상의 동상(역사 인물)을 시청 앞에 세웠으며, 유명 작곡가에게 의뢰해 <우리는>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시민에게 보급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 야구장 신축 문제로 세 도시 사이에 갈등만 키웠고, 최윤덕 장상에 대한 시민의 관심은 밑바닥 수준이며, 그 특별한 노래의 유튜브 조회수는 11년이 다 돼가지만 3,000회를 겨우 넘겼다.

 

스토리 공동체는 당위성만 갖고 구호를 외친다고 형성되는 게 아니다.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의 머리가 아닌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연결된 투명한 시대에 사람 마음 얻기가 쉬울 수 없다. 그만큼 비전이 뚜렷해야 하고 투자도 뒷받침돼야 하며 실행 과정도 섬세하고 전략적이어야 한다. 어느날 갑자기 한지붕 아래 살게 된 부산, 울산, 경남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공유하면서 공통의 기억과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스토리가 생산되는 지점
부울경 특별연합은 어디에서 통합의 스토리텔링을 찾아야 할까? 세 지역 모두 경상남도라는 뿌리를 갖고 있지만 부산은 1963년 직할시로 분리됐고, 울산은 1997년에 광역시로 독립했다. 행정적인 분리도 장애물이지만 각 지역 생활권이 따로 형성됐다는 사실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ㅇ 수도권이라는 빌런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텔링이 흥미를 끌려면 선악구도가 명확해야 하는데, 부울경 특별연합에게는 수도권이라는 확실한 빌런(악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기회요인이다. 원래 민족정체성이란 것도 내부의 원인과 역량보다는 이민족의 침략 같은 외부 요인에 빚진 경우가 많다. 우리가 아는 유럽의 민족들 상당수가 9세기부터 시작된 바이킹의 침략 시대 때 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수도권의 문제점과 부작용을 집요하게 천착하면서 부울경의 대응 노력을 선명하게 부각하는 스토리텔링은 초창기 특별연합의 정서를 묶어주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요컨대 다양한 분야에서 수도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ㅇ 이야기와 영웅을 탄생시키는 플롯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좋은 작품이 나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플롯”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인물을 등장시켜도 플롯이 잘못 구성되면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도시 안에서 수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 성격이 일상적일 때 새로운 이야기나 영웅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새 영웅을 탄생시키려면 특별한 플롯이 필요하다. 방송국이 오디션 포맷을 선호하는 이유는 영웅을 탄생시키는 플롯이기 때문이다.


메가시티 안에서 그런 플롯들을 다양하게 설계하고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스포츠’는 아직 긁어보지지 않은 복권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체육센터와 운동장에서 스포츠활동을 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그 어떤 영웅도, 스토리도 탄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플롯을 적용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당장이라도 시정부가 앞장서서 선수와 경기 기록을 관리하고 종목별 리그를 체계적으로 정비해보자. 어느 스포츠클럽이 부울경에서 최고인지 겨루는 그림을 만들자. 합을 겨루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영웅과 감동의 스토리들이 쏟아지지 않겠는가? 이런 플롯을 스포츠는 외에도 문화예술 분야로 확장해 나갈 필요가 있다.


ㅇ 결국 사람 이야기
사람들은 ‘사람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즐거워 한다. 하루 이야기하는 시간 중 75%를 사람 이야기에 할애하고, 그 중에 절반은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한다는 흥미로운 조사 결과도 있다. 결국 영웅이든 악당이든 권역 내 시민들이 함께 기억할 인물이 얼마나 있느냐가 스토리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된다. 문화정체성 관점에서 보자면, 메가시티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지역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가가 관건이다.


지역 내에서 스타가 많이 등장해야 한다. 앞서 제시한 ‘도시 플롯’은 스타들이 탄생하는 등용문 역할을 할 수 있다. 추가로 발굴해야 할 사람 이야기 ‘광산’이 있다. 바로 지역 정치와 시사 분야다. 전국 규모의 정치와 시사 인물이야기는 차고 넘치는데 지역 차원의 정치와 시사 스토리텔링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기초 의원과 광역 의원의 활약, 그리고 이해 관계를 둘러싼 세력간 경쟁 등이 지역민의 일상 속에서 화제가 될 수 있게 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스토리 확산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하부구조
스토리를 만드는 활동 못지 않게 그것을 의미있게 확산하는 시스템이 중요하다. 현재 대한민국 대부분 지역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서울과는 더없이 밀착됐지만, 그곳 내부는 더없이 성긴 구조를 갖고 있다. 서울 연남동 이야기는 웬만한 지역 사람들이 다 알아도 울산 태화동 이야기는 울산시민 말고는 알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이 구조를 획기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지역에서 이야기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력을 아무리 기울여도 그 효율성과 효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커뮤니케이션 하부구조 이론(Communication Infrastructure Theory)’을 도시 차원에 적용해보고 평가와 개선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김용찬 교수가 개발한 이 이론은 도시의 커뮤니케이션 하부 구조에 따라 도시 공동체의 스토리텔링 활동이 영향을 받고, 그 결과 시민의 참여도가 달라진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시민이 도시 공동체에 소속감과 결속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하부구조가 건강하게 구축되고, 그 속에서 스토리텔링 활동이 활발하게 작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커뮤니케이션 하부구조는 도로나 아파트처럼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처럼 테크놀로지가 발달한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사실 커뮤니케이션 하부구조는 다분히 문화적인 결과물이다. 오랫동안 공동체에 축적되고 내재된 역사와 규범이 커뮤니케이션 하부구조의 골간을 이룬다. 그러나 우리나라 도시들은 안타깝게도 그 하부구조가 중앙 권력이나 시장 권력에 의해 훼손된 채로 장기간 방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회복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전히 수도권으로 쏠리는 중력이 워낙 강해 지역 내 하부구조는 불완전하고 부실하다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메가시티 ‘부울경 특별연합’은 커뮤니케이션 하부구조를 밑바닥부터 새롭게 설계하고 건설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될 수 있다. 세 개 지자체 주민들의 생각과 비전을 한 방향으로 통합하고, 각 지역이 가진 자원과 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열리고 있다. 문화정체성은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공산품이 아니다.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의 스토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정한 방향으로 차곡차곡 쌓였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문화정체성은 결과가 아닌 ‘여정’으로 접근해야 한다. 세 개 지자체 주민들의 공감대를 확대하는 여정, 공통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여정, 공통의 기억을 축적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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