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유통만으론 안 되겠지만, 유통은 정말 중요하다
조봉권
유국제신문 부국장 겸 문화라이프부장
문화정책 이슈페이퍼 이번 호 주제가 ‘유통’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는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무언가 가슴속 격동의 스트링을 살짝 건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부산의 예술문화 현실?과제?방향을 놓고 그간 고민하면서 정작 유통 측면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자책이 덮쳐 왔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도 있다. 예술 전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을 조금만 둘러봐도, 유통 영역의 비중과 중요도가 어마어마하게 커졌음을 알 수 있다. ‘플랫폼 경제’ 말이다.
아주 단순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공들여 잘 만든 상품이 있다. 이 상품이 네이버쇼핑이나 아마존에서 검색이 되는 경우가 있겠고, 검색이 안 되는 경우가 있겠다. 운명은 어떻게 될까? ‘온라인 유통업’으로 몸을 일으킨 아마존의 최고 경영자 제프 베이조스가 2022년 현재 세계 제2위 부자(순자산 1710억 달러)인 사실은 현대 디지털 사회에서 너무 커버린 유통의 힘과 영향력을 말해준다.
예술가는 뜻밖에 유통에 목마르다
부산의 이광 시조시인과 정희경 시조시인은 올해 5월 영문으로 번역한 2인 공동 시조집 ‘K-Poem Sijo: the Root of the Korean Wave’를 아마존에 올렸다. ‘시조, 한류의 뿌리’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9월 3일 현재 이 시조집의 베스트셀러 순위는 아마존의 전자책 킨들(Kindle) 스토어에서 3백39만5912위로 존재감은 미미하다. 하지만 킨들 스토어의 아시아 문학(Asian Literature) 분야로 좁히면 순위는 743위다. 아시아 문학 부문에서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으로 팔린 순위는 5203위다. 모집단 규모를 알 수 없어 이런 수치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 짐작이 안 되지만, 높은 순위가 아닌 건 분명하다.
그렇다 해도 ‘킨들 스토어 아시아 문학 743위’면 왠지 선방하는 느낌도 있다. ‘아시아 문학 100위’ 안에 한국 책은 현재 6종이 있는데 모두 외국인이 한국어 학습을 하는 데 유용한 이야기책(예컨대 Korean Stories for Language Learners)이지, 시 소설 등 이른바 정통 문학도서는 거의 안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덩치가 작은 장르인 시조가 이 정도면….
이광과 정희경, 두 시조시인은 한국의 시조시인이 쓴 시조 단행본이 아마존에 올라간 전례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시조 세계화를 오래전부터 꿈꿔온 한국 시조시인들의 유통 경로 갈증과 도전을 이 사례에서 본다.
부산의 인디 밴드 세이수미는 광안리 해변에서 주로 공연하다가 서울 또는 중앙을 우회해 곧장 세계로 나가버린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방호정 작가가 그간 세이수미에 관해 꾸준히 쓴 글을 읽어 보면, 이 밴드는 여전히 해외 공연 일정이 꽤 많다. 부산 광안리에서 곧잘 직접 만든 영어 노래를 흥얼거리던 세이수미는 서구의 팬과 전문가에게 발견돼 몇 차례 ‘본토’(영국 미국 등) 공연을 거친 뒤 곧장 ‘해외 투어 밴드’가 됐다.
‘창작’에 집중된 에너지와 지원
위의 두 사례가 ‘과연 정확히 유통과 관련된 일이냐’는 반론이 있을 줄 안다. 내가 다시 들여다봐도 이 사례들이 ‘유통’이라는 과녁에 정확히 꽂히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유통과 관련된 사안이 아닌 것도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부산의 예술계는 대체로 유통에 관해 역량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거나 그럴 여력이 모자랐다.
최근 10~15년 사이 부산 예술, 특히 순수 예술 계통에서 지원금 제도가 정비되면서 예술에 대한 지원금은 거의 상수가 됐다. 국가와 지자체가 공적 재원을 투여해 예술을 진흥하고 사회에 창의력?활력?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런 지원이 주로 ‘창작’ 영역으로 쏠리면서 몇 가지 현상이 파생되기도 했다. 지원금이라는 존재의 비중이 매우 커졌다. 지원금만큼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이 지원금은 대체로 작품 창작에 투입됐다. 이를 통해 좋은 작품이 곧잘 나왔다. 이 과정에서 창작에 엄청난 에너지가 생성되고 발휘되기는 했는데, ‘그다음’ 또는 ‘다음 단계’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 또는 현상이 생겼다.
공연은 단발성이 많았고, 책은 일단 출판만 되고 나면 안심이 되어 어떤 플랫폼에 이 책을 배치하면 더 많은 독자를 만날지 고민하는 데로 이어지기 힘들었다. 예술에 대한 공적 지원의 바탕을 이루는 철학은 ‘이렇듯 창의적이고 새로운 시도와 실험은 시장에서 인기리에 팔릴 가능성이 적으므로, 공적 지원을 해야 하며, 이를 통해 사회는 유무형의 가치와 이익을 수확한다’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부산에는 예술 창작자는 많지만, 이를 떠받칠 시장은 없다’는 쪽으로 고착됐고 ‘어떻게 이 작품을 더 널리 알리고 보급할지’ 진화하는 방향을 사실상 차단했다. 유통에 관해 고민하기 싫어서 안 한 게 아니라, 창작에 에너지를 쏟고 나면 거기까지 생각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현실도 분명히 있다.
어느 날 공연장에서 ‘왜 이 좋은 걸 나 혼자만 보고 있지’ ‘이 작품을 왜 단발성으로 끝내고 말아야 하는 걸까? 아마 이 작품의 존재도 모르는 시민이 절대다수일 텐데’ 하는 상념에 젖은 밤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존경하는 공연예술가가 “나는 여전히 좋은 작품을 만들면 관객은 오게 돼 있음을 믿는다”고 말할 때, 나는 속으로 ‘그렇지는 않을 텐데요’라고 읊조렸다.
어쩌면 안 가본 길
그러는 사이 플랫폼 경제 시대가 왔고, 거의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초연결시대가 왔고, 문화예술교육 시대가 왔다. 부산시와 부산문화재단이 최근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BPAM), 학생공연예술마켓 어릴적 예(藝), K-아트페스티벌 등을 잇달아 마련할 계획을 밝혔다. 이어 단발성 공연의 재공연 지원이나 극장이 입주한 건물에 대한 세금 감면 같은 ‘시스템 개선’ 차원의 방침도 내놓았다. 몇 개월 전 이에 관한 계획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다. 이번에 종합 계획을 접하고 보니, 아! 유통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간간이 좀 작은 규모에서 예술 유통에 관한 논의는 있었다. 마켓 유치나 재공연 지원 사업 등이다. 그런데 이걸 ‘통으로’ 접하니 문득 나 자신도 ‘부산엔 시장이 없다’는 생각에 너무 파묻혀, 이 명백한 초연결과 유통의 시대에 그쪽 고민을 거의 하지 못했음을 깨우쳤다.
문화정책이란 이런 식으로 큰 단위에서 방향을 제시하거나 틀어주는 일을 할 수 있음도 느꼈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통만으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고 거듭 생각해 봐도 유통이 정말로 중요해진 시대에 우리는 닿았다.도전해 볼 가치가 큰 방향이다. 구체적인 방향에 관해서는, 이쪽 경험이 없는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예술문화 분야가 사회와 맺는 관계의 유기성을 크게 끌어올릴 필요는 있다. 예술도 알고 사랑하며,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에도 식견이 있는 문화행정?정책 분야 전문가의 역할은 더 커질 것이다. 수요도 높아질 것이다.예컨대 각 급 학교에서 문화예술교육?요청?수요가 커지고, 교육청은 이를 위해 예산을 투입할 준비까지 돼 있는데, ‘저는 문화예술 전문가라 교육청 시스템은 잘 모릅니다만’이라고 말해서는 아예 유통망을 짤 수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유통에 주목하는 정책 변화가 성공할지 못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