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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역의 기억과 장소 사용법

발행일2024-06-01 발행처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지역의 기억과 장소 사용법

박소윤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센터장 · 부산대학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 협동과정 겸임교수

장소는 기억이 배인 공간이다. 그곳은 살던 집이기도 하고, 오밀조밀 어디론가 내달리던 골목길이었다가, 학교, 문방구, 은행들이 있는 동네가 되고,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보았던 지역의 풍경이 되기도 한다. 오래된 앨범 속 빛바랜 사진을 통해 잊고 지냈던 사람과 추억들이 문득 다가오는 것처럼, 장소 역시 사람, 경험, 감정이라는 사건을 통째로 간직하고 있는 타임캡슐이 될 때가 많다. 그와 같이 장소는 그곳이 간직한 기억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지역은 지역민의 일상 공간으로써 장소화 되며, 그때 장소의 기억은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으로써 현재와 미래에 작동하게 된다.
부산이라는 지역은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일제강점기의 개항도시, 한국전쟁기의 피란수도, 4월혁명의 진원지이자, 신발, 합판 등 제조업과 조선업, 원양어업으로 한국경제 성장을 견인했던 기억일 것이다. 이는 구체적인 장소를 통해 환기되고 출력된다.
부산 최초의 은행이었던 한성은행은 한성1918 생활문화지원센터가 되었고, 옛 경남도청은 석당박물관으로, 피란수도 때 정부청사는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남아있다. 미군정 문화정치의 심장이던 미문화원은 1980년대 미제국주의 타도 구호와 함께 던져진 화염병으로 그을렀었으나 지금은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이 되었다. 그 곁의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건물이 이곳의 본관이다. 원도심 중심부에 우뚝 솟은 민주공원은 민주화 운동의 발자취를 되새겨준다. 또, 2023년 12월, 일제강점기 한반도 수탈의 현장이자 한국전쟁 때 유엔군 투입과 유엔 원조의 통로, 산업화 시절 수출의 경로였던 제1부두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 결정되기도 했다. 그뿐이겠는가. 아미동 비석마을과 중구, 동구의 산허리를 휘감는 산복도로 마을들은 피란민들의 팍팍한 삶의 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장소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각하게 해주는 역사의 거울이자 과거로 안내하는 지도다.

그동안 발전이라는 개발 담론 아래, 사라진 장소도 많다. 놀라운 것은 장소의 파괴는 기억의 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때 부산에서 주목받았던 옛 부산시청 건물, 럭키화학 공장, 일제강점기 금강공원 인근 서양풍 별장(히가시하라 가지로의 별장으로 추정됨)과 같은 건물뿐 아니라 동네 전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부산문화재단이 있는 감만동도 한국전쟁 때 이주한 피란민들, 항만 노동자들의 생활근거지가 되었으나 2016년 뉴스테이 연계형 정비사업으로 지정되면서 감만 1동 일대 부지인 41만 8,719㎡가 완전히 사라지고 9,092세대의 아파트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2018년 미디어 아티스트 홍석진과 안무가 허경미의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감만기억>은 이러한 감만동 일대의 흔적을 붙잡는 아카이브 작업이었다.

장소가 남는다는 것은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장소의 소멸은 일상에서 해제되었기에 기억 속에 아스라이 잔류하거나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사라지는 기억을 모으기 위해 부산일보는 2022년 10월 레코드 부산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열고 옛 도시 풍경과 사람들의 추억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곳에서는 사라진 미화당백화점, 무아음악감상실, 동보서적 등의 장소를 지금의 감각 안으로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지역의 기억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지역이 나아갈 방향성을 알려주는 지식자원이기 때문이다. 미국 디트로이트시는 포드, 크라이슬러, 제너럴 모터스와 같은 자동차 회사가 있는 도시로 1950년에는 인구수가 185만명에 달하였으나 생산공장과 시설이 다른 지역과 해외로 이전되자 지역 경기 쇠퇴와 함께 인구 유출이 발생했다. 이에 도시 기반 시설이 노후화되고 도심이 공동화되었으며 마침내 2013년 7월, 디트로이트시는 파산했다. 하지만 연방정부의 전방위적인 지원, 지방 정부와 민간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서고 있다. 지역의 건물이나 아무도 쓰지 않는 공간을 철거하지 않고, 문화적으로 재생시키는 노력도 함께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빈 건물로 버려져 있던 소방서를 개조한 디트로이트 파운데이션 호텔(Detroit Foundation Hotel), 자동차 판매점을 개조한 디트로이트 현대미술관(MOCAD: Museum of Contemporary Art Detroit)을 들 수 있다. 자동차 제조도시라는 지역의 DNA는 포드, 제너럴 모터스의 투자를 다시 일으켰다. 1988년 이후 문을 닫았던 미시간 중앙역이 포드에 의해 자동차 첨단 기술 개발 연구시설로 재생되어 2024년 6월 뉴랩 엣 미시간 센트럴(Newlab at Michigan Central)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지역의 정체성과 기억을 간직한 유니크한 공간 속에서 실업률 감소와 경제회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때 390만명(1995년 기준)에 육박했던 부산의 인구수도 4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생산 구조의 변화, 저출생, 수도권 집중 등의 사회 변화 속에서 320만명(2024년 4월 기준)으로 감소했다. 최근 10년간의 추이를 보면 연평균 2만 3천명 정도 감소하고 있는 상황이다. 합계 출생률도 전국 평균 0.72명보다 낮은 0.66명(2023년 기준)이며, 고령인구의 비율도 22.8%(2023년 기준)로 초고령사회 지표가 되는 20%를 넘고 말았다. 인구 감소는 빈 공간의 증가로 이어진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디트로이트시의 사례처럼 이는 지역의 문화자원이 될 수도 있다.

장소는 기억을 인도하고, 기억은 지역의 정신적, 정서적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역은 기억을 어떻게 간직하고 활용할 것인가. 빈 건물과 폐관된 시설은 경제 논리로 허물어 버릴 것이 아니라 과거의 흔적과 역사를 바탕으로 한 공공의 공간으로 남겨야 한다. 이때, 도시재생사업과 지역관광사업의 결은 달라야 한다. 두 사업의 목적과 추진 프로세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도시재생사업은 그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진 시민들의 문화 접근성을 높이고 일상 속에서 쾌적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하며, 관광사업은 관광객 유입을 활발하게 하여 경제적 수익이 증가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관광 수익 확대가 목적이라면 빌바오나 시드니의 사례처럼, 이전에 없던,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건물이나 시설을 지어 볼 거리를 만들어야하겠지만, 지역의 장소 기억은 지역민의 일상 속에서 작동되는 것이 더 유익하다. 일상공간으로 재생되는 것이 그 기억을 더욱 자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옛 한성은행이 시민들을 위한 생활문화지원센터가 된다든지, 한국은행 부산본부가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변모하면서 1층에 카페를 들여 개방감을 높이는 것이 그런 뜻이라고 본다.
또한 지역의 기억은 유·무형유산처럼 자긍심을 높이기도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아픔을 되새기는 일도 될 것이다. 영광의 기억만 남긴다면, 후세는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기업인 타테이시의 옛 주택을 중구문화원으로 개원하여 지역민의 문화사랑방으로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예이다.

한편 시민의 미시사, 즉 마을 기억의 문화화 작업도 중요하다. 산복도로 피란민의 삶터를 문화적으로 재생한 산복도로 르네상스사업이나 감천 태극도 마을을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조성한 감천문화마을 사업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 삶의 쾌적함과 일상의 즐거움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자칫 도시재생사업과 지역관광사업이 방향성을 잃고 혼용될 경우, 오버투어리즘이나 슬럼 투어과 같은 폐단이 나타날 수도 있다.
장소는 기억의 저장소이고, 기억은 미래에 남길 지혜이므로, 지역의 장소들은 그 기억을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삶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곳에서, 오늘의 기억을 만들어 간다.

 

지역의 기억과 장소 사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