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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양성, 지역의 힘

발행일2024-08-29 발행처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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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지역의 힘

 

창파
실험실 C 아트디렉터

 

사라지거나 단순하거나


지역의 다양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 이야기를 기수역이라 불리는 중간지대에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 기수역은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하구의 넓은 구역을 일컫는다. 부산에는 510km 길이의 거대한 낙동강이 흐르고 흘러 다대포의 바다와 조우하는 낙동강 하구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표 기수역이었다. 1987년 하굿둑이 기수역의 순환을 가로막기 전까지, 짠물은 삼랑진을 향해 거뜬히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낙동강 하구는 열린 하구로서 기능을 상실했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1 그나마 2019년부터 9번 수문을 정기적으로 개방하면서 기수역의 자정능력(自淨能力)과 생태계 복원을 실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다행이다.2

실제로 기수역은 담수 생태계와 해양 생태계가 어우러진 풍요로운 공간이기 때문에 다양한 생물이 산다. 사람 역시 기수역 주변에 터를 잡고 기대어 삶을 일구거나 생활사를 쌓아 왔다. 거대한 강어귀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오랜 세월 풍요의 공간이었다. 낙동강 하구는 “섬 대부분이 갈대밭과 습지로 이뤄진 동아시아 최대의 철새 도래지”였으며, “뱀장어, 흰베도라치, 실양태, 밴댕이, 멸치” 등 수백 종의 어류가 마르지 않던 곳이었다. 강이 운반한 모래에선 “씨알이 굵은 낙동강 재첩”이 자라던 장소였고,3 기수역 질 좋은 물을 받아 소금가마에서 팔팔 끓여 고운 빛깔의 자염을 굽던 염전도 이곳에 있었다. 지금의 하구는 변했고 생태계는 단순해졌다.

 

중간지대


단순하다는 건 획일적이고 반복적이다. 갯벌이 매립되고 아파트와 산업단지가 세워진 명지 지역에서 염전이 운영되던 1950년 지도와 2015년 항공사진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확실히 드러난다. 기수역은 단순할 수가 없다. 기수역 전역은 짠물과 민물이 섞이면서 여러 가지 염도의 층위가 형성된다. 그 염도는 0.5∼30‰(퍼밀·1천 분의 1)로 굉장히 광범위하고 계절이나 강수량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기수역(汽水域)이란 이름은 염도가 낮은 민물과 염도가 높은 짠물이 교차하면서 서로 다른 농도 차이로 물속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현상을 나타낸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기수역을 오가는 생물은 점차 진해지거나 서서히 옅어지는 염도에 유연하게 적응해 가며 염분을 조절하는 조작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바다와 강 사이에서 일렁이는 물 아지랑이를 넘나들며 경계 감각을 확장한다. 기수역의 독특한 환경은 회유성어류나 염생식물처럼 다양한 초경계자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며, 이편과 저편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게 하는 완충지대가 되어준다. 기수역의 저력은 다양성을 유발하는 중간지대에서 나온다. 그곳에는 경계를 넘나드는 초경계자들이 있다. 지난해 낙동강 하구와 기장의 일광천을 각각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리서치하면서 기수역이던 두 곳을 비교해 관찰할 수 있었다. 낙동강 하구는 인공기수역4, 일광천은 열린 하천이다. 일광천은 10개 지류가 합쳐져 바다로 흘러간다. 그리고 밀물 때 일광천으로 바닷물이 올라온다. 일광천에는 매년 3월이 되면 바다에서 천으로 올라와서 돌 아래에 알을 낳는 사백어가 등장한다. 사백어는 몸길이 5cm 정도에 투명한 물고기이다. 일광천에서 태어난 사백어의 치어는 기수역에서 자라다가 일광 앞바다 잘피군락으로 돌아간다. 사백어 외에도 낙동강 하구와 일광천에서 먼 바다로 나가 산란하는 뱀장어는 기수역의 짠물에서 바다로의 항해를 준비한다. 사백어와 연어처럼 산란을 위해 민물로 들어오는 회유성어류 역시 기수역에서 민물에 적응해 간다. 기수역이 보여주는 순환은 중간지대의 포용력이라는 놀라운 역할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오랜 시간 기수역의 풍요로운 생물다양성이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하지만 또 얼마나 쉽게 훼손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나에게 기수역은 다양성의 공간이다. 서서히 뒤섞이고 천천히 적응하며 다른 성질을 받아들이고 매개하는 능력, 이것은 다양성을 일구기 위한 태도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라는 경계 너머


모든 강은 바다로 모여든다. 하지만 바다로 흐르는 모든 강이 기수역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의 하천은 3,835개, 그중에서 바다로 직접 유입되는 하천은 463개, 이 중 하구의 순환이 이뤄지는 열린 하구는 단 52%인 235곳에 불과하다.5 1987년 이후 낙동강 하구는 인공적인 하구가 되었다. 짠물의 흐름이 인공적으로 차단되자 어종이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일광천 역시 우려되는 상황이다. 리서치를 위해 일광천을 찾았던 2023년 2월부터 8월까지, 산책로를 조성하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몇 년 전 촬영된 사진 자료에 보이던 갯벌과 습지, 수풀이 우거진 여울은 이미 사라졌다. 물속 사정도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편의를 위해 하구를 매립하고, 강에 다리를 놓고, 자연공간에 공원이나 산책로를 만든다. 단일하고 단순한 생태계만이 남게 된다. 이는 지구의 자정능력 상실로 이어진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전 지구적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비인간의 행위도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간지대에서 도약하기


코스타리카의 열대우림에는 ‘영원한 아이들의 숲(Children’s Eternal Rainforest)’이 있다. 이 숲은 또 다른 중간지대이다. 1987년 스웨덴의 작은 시골 학교에서 열대우림이 위협받는다는 강연을 들은 아이들은 열대우림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방송국에 편지를 보내고, 역도대회를 열고, 빵을 팔았다. 아이들은 300달러를 모았고, 약 1만 5천 평의 숲을 샀다. 그리고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난다. 열대우림을 지키려는 아이들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난 것이다. 모금 활동은 세계 곳곳으로 확산하여, 1992년에는 코스타리카 몬테베르데의 6천8백만 평의 열대우림을 구입하고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숲을 지켜내자, 다양한 식물과 동물 종이 남게 되었고, 코스타리카 정부도 열대우림을 보호하는 생태적인 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열대우림은 지구의 생물종 가운데 50%가 서식하는 곳이며, 우리나라의 3분의 2 정도인 코스타리카에는 전 세계 동물 종의 5%가 살고 있다.6 ‘영원한 아이들의 숲’은 바나나 농장과 목장의 획일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보호된 중간지대에서 다양성의 도약은 시작된다. 다양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다양성은 기수역에도 아이들이 지켜낸 숲에도 지금 당신의 곁에도 있다. 중간지대는 단절된 것을 매개하고 다양성을 연결한다. 기수역의 중간지대가 다름을 섞어가며 여러 층위의 완충지대를 형성하듯이,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중간지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순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의 속도를 재정립하고 인간 바깥의 세계로 초경계적인 장을 열어야 한다. 그곳의 이름은 아마도 문화 기수역이 될 것이다.

 

1 부산일보(2012.04.24.), “기수역 왜 중요한가”를 보자. 이 기사는 낙동강 하구의 생태를 복원하려는 이들의 노력이 생생히 전해진다. 나는 기수역의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판단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아직 우리 곁에 재첩도 뱀장어도 연어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2 한겨레(2024.03.15.), “낙동강 하굿둑은 어느 때나 다 열 수 있을까?”에서 낙동강 하굿둑은 10개의 수문 가운데 9번 수문을 음력 보름과 그믐의 대조기(사리)에 하루 2~4시간 정도 연다. 9번 수문을 통해 대조기에 짠물은 강으로 역류한다.

3 한겨레, 위의 기사, 일부 인용.

4 신영철(2013), 「4대강 하구의 속성 가치 추정-다항로짓모형에서 IIA가정의 검토와 대안 모형을 중심으로-」, 『자원?환경경제연구』, 제22권 제3호, 524. ‘하구순환이 차단된 인공하구’라는 표현에서 가져왔다, 인공하구와 인공기수역은 낙동강처럼 하굿둑이나 보로 인해 자연순환이 훼손된 기수역이란 의미이다.

5 ibid, 524.
6 유영초(2005), 『숲에서 길을 묻다』, 한얼미디어,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