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치유하는 예술활동
- 먼구름 한형석 선생
이상헌(부산일보 기자)
코로나19는 국경도, 종교도, 나이도 묻지 않는다. 그 와중에 바이러스는 눈이 달렸는지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희한하게도 잘 찾아낸다. 약자에게 유독 가혹한 재난의 불공평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관철된다. 외신이 전하는 혼돈의 현장은 충격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모자라다. 시체와 산송장을 남겨두고 의료진이 사라진 노인요양원에서,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공포가 부른 총기와 탄환 사재기 현장에서, 극단적인 각자도생의 민낯을 목격한다. 또 다른 뉴스에서 생업을 잠시 중단하고 의료 공백을 메우려고 사지로 들어가는 의료인, “너무 적어 죄송하다”는 글과 함께 어렵사리 모은 마스크를 놓고 간 지체장애인의 선한 연대를 보면서 그래도 살 만한 세상임을 절감하고 감사한다. 없는 이에게 재난은 더 잔인하지만, 가장 먼저 슬퍼하고 따뜻한 손을 내미는 건 대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공감 능력 때문이리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힘은 양심”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양심의 외침에 호응하는 일이다. 혼자만 잘한다고 결승점에 다다를 수 없는 이인삼각 경기처럼 코로나19를 극복하는 비결은 ‘나 혼자 산다’보다 ‘함께 산다’에 있다는 상식을 새삼 확인한다.
한국전쟁 난리 통에도 ‘살아남기’가 최대 과제였다. 거리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로 넘쳐났지만 내 앞가림에 바쁜 사회가 이들을 챙길 여력은 없었다. 전쟁의 참화는 없는 이들에게 더 지독했고,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먼구름 한형석(1910~1996) 선생이 1953년 8월 부산 서구 부민동 변전소 옆 언덕배기에 목조 단층으로 자유아동극장 겸 색동 야학원을 만든 건 비참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아동극장 창립 취지서에 그런 절박함이 읽힌다. “국가 민족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걸식아동, 부랑 아동,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세상이 버린 다음 세대 주인공들에게 정신적 주식물을 제공할 것이며, 암담한 거리에서 방황하는 천사에게 활기 있는 광명의 앞길을 선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교육영화를 비롯해 환등, 음악, 아동극, 무용, 인형극”으로 아동의 정서를 보듬을 작정이라고 했다. 눈에 밟히는 건 다음 대목이다. “이런 일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설립 운영할 것이지만, 막연히 그날을 기다릴 수 없어 우선 뜻을 같이하는 몇몇 동지의 협력 결속으로 이 시급하고 다난한 사업에 첫 길을 들어가려고 한다”. 꿈도 없이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야말로 촌음을 다퉈야 할 일이었다. 사회안전망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국가에 기대하기엔 한계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사회 안전망이 무너진 자리에 세워진 문화예술 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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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자유아동극장 전경 |
그림 그림연극 공연 |
그는 모친한테서 받은 백색 전화기를 팔고, 사재를 탈탈 털고, 주변 지인이게 읍소를 해 극장 터를 매입했다. 목수를 구할 돈이 없어 공사 전 과정을 그가 책임졌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자유아동극장은 6명이 앉을 수 있는 길쭉한 의자 70개가 있어 한 번에 45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명작동화를 각색한 영화를 비롯해 아동극과 그림연극, 인형극을 2년간 500회가량 공연했다. 극장을 찾은 아이들은 11만 5000명에 이르렀다. 밤이 되면 자유아동극장은 색동야학원으로 변신했다. 버림받은 전쟁고아를 비롯해 9~17세 청소년 94명이 밤마다 야학에 나왔다. 국어, 산수, 과학, 보건 과목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사생, 공작 같은 예술 교육도 진행됐다. 배움만큼이나 주린 배를 해결할 목적으로 오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 아이들과 교사였던 부산대 학생의 끼니를 해결하느라 정작 한형석 선생 식구들은 밥을 제대로 못 먹기도 했다는 후일담도 들렸다. 낮에 극장, 밤엔 학교였던 그곳은 공동체를 먹여 살리는 문화예술 대피소였다.
그림 복화술 공연
자유아동극장 아이디어는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었다. 예술구국이란 신념을 가슴에 새기고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하던 그는 중국 최초의 아동극장을 만든 주역이기도 했다. 1935년 산둥성 지난 산둥성립여자사범부속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현대식 교사를 건립할 당시 그의 제의로 중국 최초의 아동극장이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1937년 6월 폴란드 애국 음악가 이야기를 다룬 그의 첫 아동가극 ‘리나’를 발표했다. 그가 조직한 아동가극단에서 공연했는데, 시나리오, 작곡, 연출, 주연까지 그가 맡았다. 몇 년 뒤 중일전쟁으로 거리를 헤매는 전쟁고아를 수용하기 위해 국민당 정부 지원으로 만든 산시성 시안 제2보육원에서 한형석 선생은 예술적 재능이 있는 아이 서른 명가량을 따로 모아 아동예술반을 만들었다. 중국 국민당 간사단 음악교관, 광복군 예술조장으로 전시 문화선전활동을 하는 와중에 제2보육원 아동예술반 주임까지 맡아 1인 3역을 했다. 아이들에게 미술, 문학, 음악, 무용을 가르쳤는데, 중국의 저명한 화가로 성장한 량원양, 시안시 예술학교 교장을 지낸 양치 선생을 비롯해 제2보육원 아동예술반 제자들이 여럿 생존해 있다. 몇 년 전 만난 양치 씨는 “살기 위한 목적으로 보육원에 갔기 때문에 아무런 꿈도 없었는데, 한형석 선생님의 예술반 활동이 일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라고 회고했다. 1944년 시안에서도 아동극장을 만드는 데 한형석 선생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항전 시기 부모를 잃고 고향을 떠난 아이들의 역경을 그린 아동가극 ‘낙원행진곡’을 비롯해 ‘어린 양들’ ‘집 없는 아이’를 발표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문화예술은 누구나 향유해야 할 보편적 권리
아동극장과 아동가극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귀국 뒤에도 이어졌다. 1948년 뒤늦게 귀국선을 타고 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정부 고위직을 마다하고 부산으로 낙향했다. 그가 의욕적으로 매달린 건 국립극장으로 추진하던 부산문화극장 개관이었다. 곡절 끝에 국립극장은 무산됐지만, 35년 된 낡은 보래관을 고치는 데 막대한 사재를 털어 넣었다. 수리비의 절반가량은 빚까지 내서 그가 충당했다. 그렇게 공을 들인 건 그저 그런 극장이 아니라 문화예술 철학이 담긴 공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1950년 6월 18일 문을 열기 전 몇몇 신문에 실린 기사에 그런 생각이 엿보인다. 1950년 6월 11일 자 자유민보에 문화극장을 만든 한형석 선생의 포부가 실렸다. “예술은 몇몇 사람이 독점해서는 안 되고, 특수지역 시민만 향유해서는 안 된다”로 시작하는 글에서 그는 “무대 예술 운동을 중앙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지방에도 분산해야 하며 그것을 육성하는 근거지를 지방에 둬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문화극장은 교육과 맥을 이어 아동의 예술적 맹아를 보호할 것”이라는 다짐으로 글을 맺었다. 문화 예술이 소수자의 특권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향유해야 할 보편적 권리라는 것과 함께 문화 자치분권에 일찌감치 눈을 뜬 그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화극장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그즈음 산업신문에 실린 기사에서도 “이 극장이 중점을 둘 것은 연극과 오페라이며, 아동극과 교육예술에도 치중할 것이며, 교육예술은 무료로 청소년 면학도를 위해 공개할 작정”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문을 연 지 불과 일주일 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문화극장은 국회의사당, 미군 전용극장으로 징발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53년 4월 화재로 전소되면서 극장은 기능을 상실했고, 한형석 선생이 품었던 문화예술교육 꿈도 접어야 하는가 싶었다. 좌절하고만 있기엔 시대가 너무 엄혹했다. 사재를 털어 고친 문화극장이 소실되면서 꿈을 접어야 했던 그가 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이 눈에 밟혀 몇 달 지나지 않아 자유아동극장을 만드는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어쩔 수 없이 2년 만인 1955년 자유아동극장도 문을 닫아야 했고, 그 일은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았다.
아동극장이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 선도적으로 아동 청소년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거점 마련에 나섰던 점만 고려해도 그는 남들보다 한참은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시대를 앞선 생각은 이를테면 1972년 제1회 부산 시민의 날 기획 행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거리예술의 일환으로 가장행렬을 하면서 ‘집 앞 쓸기 행렬’을 무용화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는 일상을 예술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로 읽힌다. 시민의 날 하루만큼은 통금을 해제하고 ‘차 없는 거리(無車道路)’로 만들자는 제안도 많이 앞선 생각이다. 주말 ‘차 없는 거리’를 지정해 그곳을 예술 공연으로 채운다는 발상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게 불과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산 시민의 날 계획서에선 “거듭 말하지만 이 일련의 행사를 꿰뚫는 원칙은 자발적 참여에 있다. 시민의 날은 시민 개개인이 방관적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이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데 그 의의가 깊다”라고 강조한 대목이 나온다. 문화예술교육의 요체가 주체성과 자발성에 있음을 간파한 생각이다. 신명이 나지 않는데 누가 시킨다고 억지로 할 수 없는 게 문화예술교육임을 체득한 덕분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해법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
항일 투쟁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예술의 역할이 크다는 걸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문화예술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예술 구국의 신념으로 독립 투쟁에 나섰던 때처럼 문화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해법이라고 믿었다. 중국의 아동극장, 부산문화극장, 자유아동극장으로 이어온 그의 철학은 후대에 문화예술교육이라고 명명하기 전부터 이미 확고하게 정립됐다. 베네수엘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 아마추어 음악인인 아브레우 박사가 방황하는 빈민촌 아이를 모아 카라카스의 작은 차고에서 음악 교육을 시작한 게 1975년이었다. 전 세계적인 문화예술교육 열풍을 부른 엘 시스테마도 자유아동극장보다 20년은 더 뒤의 일이었다.
코로나19 사태의 한가운데 한형석 선생이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루하루 희망도 없이 시간을 버텨내는 거리의 아이들에게 문화예술이 삶을 바꿀 사다리가 된 것처럼 코로나19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데 예술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믿고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짰을 것이다. 머뭇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머리와 가슴의 거리가 누구보다 가까운, 흔치 않은 실천가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기, 상생과 연대의 가치를 일깨우는 예술 활동 최전선에 그가 있었을 것이다.
<부산문화재단 먼구름 한형석 기념사업>
부산문화재단에서는 2020년 먼구름 한형석 선생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친다.
한형석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과 공연이 제작되고, 한형석 선생이 독립운동을 펼친 중국 시안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부산과 중국 예술가들의 국제교류사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주요사업은 다음과 같다.
<주요 사업>
학술발간: 국제 심포지엄(11월 중), 먼구름 한형석 평전 발간(10월 발간 예정)
공연제작: 2020년 브랜드콘텐츠제작지원 사업 공모를 통한 선정 후, 11월 공연 예정
국제교류사업: 중국(시안,상하이), 대만을 중심으로 국제교류 기획사업 추진 예정
문의: 부산문화재단 예술지원팀(051-745-7292), 문화공간팀(051-745-72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