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그늘을 벗어나는 가치 - 같이
이상헌(춤 비평가)
예술계가 ‘코로나19’로 수렴되고 확산하는 듯하다. 예술 활동은 위축되고 위기의 그늘은 짙어간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예술은 더 이상 예술가라는 특별한 사람이 하는 특별한 활동이 아니라는 인식이 생겼다. 예술이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인데, 예술가와 비예술가 구분도 모호해졌다. 그런데도 예술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전업 예술가라 부른다. 예술가를 규정하는 철학적, 미학적 규정은 예술이 직업이고 노동이라는 현실적인 기준 앞에서 무력해졌다. 코로나19는 사회의 가장 약한 곳에 깊은 상처를 주었고 불행하게도 전업 예술가도 거기에 속한다.
지난달 17일 오후 9시경 부산시청 앞 광장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공연 조명 기계를 실은 트럭에서 조명기와 콘솔을 내려졌고, 광장 바닥에 설치한 수십 대의 조명기에서 나온 빛이 시청 건물 위 상공 한 지점에 모였다. 빛은 규칙적으로 점멸하며 국제적 조난 신호인 SOS를 표시했다. 이 퍼포먼스는 (사)부산문화공연기술협회가 코로나19로 축제, 공연이 취소된 후유증으로 심각한 피해를 겪고 있는 축제, 공연 기술 종사자들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벌인 ‘SOS with Survival Light’ 퍼포먼스였다.
이에 앞서 부산민예총 무대예술위원회(아래 ‘무대위’)는 ‘부산지역 공연·축제 기술 관련 종사자 생존 대책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언론에 배포했다. 성명서에서 ‘무대위’는 부산시가 전면 취소한 축제를 감염 예방 수칙을 지키면서 재개할 것을 호소했다. 이들은 질병관리본부가 내린 예방 지침이 기본 가이드라인이고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산시가 이를 이유로 축제를 무조건 취소했다면서, 강원도 인제·고성에서 있었던 드라이브인 콘서트 예를 들었다. 감염을 관리하는 행정기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민을 위한 축제를 시민과 아무런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이 최선이었는지 의문이다. 인제·고성의 드라이브인 콘서트, 보성의 비대면형 머드 축제는 부산시와 같은 상황에서 다른 방법을 택한 경우다. 부산시는 축제 취소가 가져올 문제에 관해 고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예술가, 스태프가 일할 기회를 잃을 것이며, 폐쇄적 생활에 지친 시민들이 잠시나마 숨을 쉴 기회를 무산시켰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것뿐만 아니다. 성명서 발표 후 부산시 관계자와 면담에 참석한 ‘무대위’ 회원들은 부산시의 공연·축제 기술 관련 종사자들에 대한 인식에 큰 상처를 받았다. 부산시 관계자에게 공연·축제 기술 관련 종사자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무대위’ 성명서에는 이른바 축제·공연 스태프(Staff)로 부르는 공연·축제 기술 관련 종사자가 공연예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창작자라고 말한다. 축제·공연 스태프는 눈에 띄지 않게 검은 옷을 입는다. 무대 조명 밖 어둠 속이나 객석과 떨어진 조정실에 있고, 야외 공연·축제 현장에서는 관객 뒤에서 무대를 응시하는 그들에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음향, 조명 없는 공연을 상상해 보았는가. 세트를 설치하고 영상을 비추고, 필요에 따라 소품을 갖다 놓고 치우는 이들이 없다면 공연이 어떻게 되겠나. 조명으로 맥락을 만들고, 소리로 작품의 내용을 전달하고, 세트나 영상으로 상황을 제시하는 일은 기술을 넘어 창작의 한 부분이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행복, 만족, 흥분, 열정 같은 것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사회학자·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Maurizio Lazzarato)는 이런 결과를 내는 노동을 ‘비물질노동’이라 말한다. 예술가의 노동과 축제·공연 스태프의 노동은 ‘비물질 노동’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공연이나 축제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는 기술 때문에 코로나19로 인한 위기 상황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
‘무대위’ 성명서와 시청 앞에서 펼친 퍼포먼스는 예술이 코로나 시대를 헤쳐 나갈 때 필요한 중요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 ‘같이’의 가치다. 축제 하나를 취소하면 음악가, 무용가, 배우, 스태프 등 많은 사람이 ‘같이’ 어려움을 겪는다. 예술은 관계에서 생성되고 공동체 안에서 존재한다. 공동체를 위한 예술, 공동체의 예술이 된다는 말이다. 축제·공연 스태프들은 성명서와 조명 퍼포먼스를 통해 ‘같이’ 위기의 그늘을 벗어나자고 말한다.
예술계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조금씩 늘고 예술계도 언택트 시대에 필요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모한 ‘언택트 시대의 예술과 기술 연구자 모집’ 사업은 예술계가 현재 고민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에도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있다. 바로 ‘예술가’의 생존 문제이다. 어떠한 미학적, 기술적 방법도 그것을 구현할 예술가의 생존이 우선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언택트 시대에 예술의 적응 방법을 고민할 때 예술가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예술가 기본소득’이 하나의 방법인데, 사회적 공론화와 합의가 필요한 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이루어야 한다면 지금이 시작하기에 적절한 시기다. 공동체의 기저를 넓게 떠받치는 계층이 건강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기형적으로 변한다. 공동체의 가치가 왜곡되고 계층 간 불균형이 극대화해 배제와 소외가 당연시될 것이다. 약한 곳을 위한 새로운 기준, 그것이 ‘언택트’ 시대에 필요한 ‘뉴노멀’이다. 예술가 기본소득에 접근할 때도 ‘노멀’ 보다 낮은 기준의 ‘뉴노멀’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사회의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들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뉴노멀’은 기존 ‘노멀’과 같은 층위가 아니라 더 낮고 넓은 것이어야 한다. 기회와 위기를 ‘같이’ 감당하고 헤쳐갈 수 있는 낮은 평균 말이다.
사회의 가장 약한 계층에 속하는 예술가들은 이때까지 스스로 돌보기보다 사람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자연과 공동체의 숨은 문제를 끄집어내어 건강성을 회복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예술가가 위기의 그늘에 갇힌 채 허덕이고 있다. 이제 공동체가 예술가에게 ‘같이’ 살아가자고 손을 내밀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