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아카이브

HOME 정책아카이브 문화정책이슈페이퍼

해당메뉴 명

메뉴 열기닫기 버튼

문화정책이슈페이퍼

[이슈] 어쩌다 부산, 좋아서 부산

발행일2024-04 발행처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어쩌다 부산,
좋아서 부산

 

김미양
작가, 기억과 부엌 사이 대표

 

제주 사람이 ‘어쩌다’ 부산에서 10년
   벚꽃이 곧 흐드러지게 피어날 듯 말듯, 사람 마음을 간지럽히는 시기다. 내가 난생처음 부산 땅
을 밟았던 날도 꼭 지금과 같은 봄날이었다. 10년 전, 캐리어 하나 질질 끌고서 부산역을 빠져나오던 그때만 해도 부산에 이리 오래 머물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눈 감았다 떠 보니어느새 10년. 그사이 나는 부산에서 책을 내고, 부산에서 문화기획을 하며, 부산 토박이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 명실상부 ‘부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주에서 태어나 대전 찍고 부산.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한 나의 주소 변동 이
력 때문에 이런 질문도 자주 받았다.
     “제주도 사람이 어쩌다 부산에 오게 됐어요?”
처음엔 상세하게 답변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우여곡절이 많아도 결국은 세 단어로 압축되
는 사연이었다. 고향을 떠나 대전으로 간 이유는 ‘학업’, 부산에 오게 된 이유는 ‘취업’, 부산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게 된 이유는 ‘혼인’.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질문과 답이 모두 불만족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서울에 살고 있었다면 사람들이 내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청년에게는 아무도 상경하게 된 이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왜’가 필요치 않으니까. ‘인 서울’을 목표로 삼는 것이 당연한 서울공화국에 우리는 지금 살
고 있으니까.


우리에겐 ‘서울’ 외에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다.
   한때 제2의 수도였던 부산은 이제 ‘노인과 바다’라는 자조적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다 보니 부산시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서울로 떠나는 청년들을 붙잡고, 외부 청년들을 이곳으로 유입시킬
수 있을지가 주요 관심사다. 부산 청년들이 입 모아 외치는 것은 ‘일자리 증대’와 ‘주거비 완화’다.
   물론 그것만도 단기간 내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 욕심을 내어보고 싶다. 고향과 서울 외에 자신이 살아갈 지역을 선택하는 우리의 기준이 더 주관적이고
다채로워지기를 꿈꾼다.
   내가 부산에 오게 된 결정적 요인은 ‘일자리’였지만, 내가 부산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살게 된 배
경에는 또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제주도 출신인 나에게는 대학 시절 머물렀던 대전보다 부산 음
식이 입맛에 잘 맞았다. 또 대도시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제주도처럼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이 크나큰 매력이었다.
   나처럼 다른 지역에 살다 부산에 정착하게 된 주변 청년들 또한 저마다의 사적인 이유를 하나씩 품고 있었다. 바다, 산, 강이 함께 있어 언제라도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한 도시라서. 지하철과 고속버스, 기차, 비행기, 배, 모든 이동 수단이 갖춰진 교통의 중심지라서. 날씨가 덜 춥고 덜 더워서. ‘붓싼아이가!’로 다 통하는 부산 사람 특유의 낙천적이고 시원시원한 성미가 잘 맞아서.
   부산을 택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는 없지만 부산에서의 삶을 더 행복하게 하는 지극히
사소하고도 사적인 비결정적 요인. 이러한 점들은 두 개 이상의 도시에 살아보아야만 몸소 발견할 수 있는 매력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청년들에게 주어진 건 “in 서울 or not” 이 두 가지 선택지만이 아니라는 걸, ‘나에게 잘 맞는 지역’이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걸 청년들이 눈으로 보고 발로 걸으며 직접 느껴볼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2023년도 영도문화도시 연결기획자 지원사업에 선정된 <유토피아를 위한 공동기획구역> 프로젝트는 그런 점에서 인상 깊었다. 부산 영도에 도착한 울산 기획자와 장생포에 도착한 영도 기획자가 서로의 낯선 도시를 탐색하며 각자의 눈으로 직접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내는 실험이었다.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지역들의 세세한 명칭을 다시 호명하며 서로 다른 개성과 매력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계속된다면, 청년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도 자
연히 늘어날 것이다.


‘교류’와 ‘재발견’으로 다시 생동할 부산 문화예술을 위해
   머물 수 있는 집과 최소한의 생계비만 보장된다면, 부산은 누구에게라도 한 번쯤 ‘살아보고픈’ 도시다. 타 지역 청년예술가들이 부산에 머물며 창작활동을 해볼 수 있도록 하는 레지던시 사업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보면 어떨까. 단, 여기저기서 유행하는 ‘한 달 살기’ 프로그램처럼 일시적으로 끝나는 사업은 바라지 않는다. 사업이 끝난 후에도 꾸준히 부산과 관계를 맺으며 두 지역을 오가거나 혹은 부산에 뿌리를 내리고 자생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주는 사업이 필요하다.
   현재 부산문화재단에서 진행 중인 예술인파견지원사업 ‘굿모닝 예술인’과 ‘굿모닝 예술로’ 사
업 외에 타 지역 문화예술인을 부산 기업과 매칭시키는 이른바 ‘웰컴! 예술인’ 사업을 시도해보았으면 한다. 부산에서의 활동 경험으로 시작해 부산에 정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화예술기관 연수단원 지원사업’과 ‘연수단원 정규직 고용전환 장려
금 지원’ 제도도 부산식으로 풀어보면 좋겠다. 부산에 거주하는 청년뿐만 아니라 타 지역 청년들도 부산의 문화예술단체에 연수단원으로서 근무하면서 일 경험을 쌓고, 이후 정규직 취업으로 연
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관련 분야에서의 근무 경험 없이 독립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다 보니 실무에 대해 조언해 줄 사수가 없어 힘든 점이 많았다. 문화예술단체에서의 연수 경험은 이러한 막막함을 해소시켜주고, 문화예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펼쳐나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 중인 지역 청년예술가들에
대한 조사를 선행해주시기를 당부드리고 싶다.
   「2023 부산광역시 문화지표조사」에 따르면, 부산은 전국 평균 대비 2040세대 예술인 비율이
낮은 편이다. 미래의 문화예술을 끌고 갈 성장 동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로는 결코 부산 청년 문화예술의 현주소를 다 읽어낼 수 없다. 이 통계에는 한
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활동증명’을 마친 예술인만 집계가 되어 있으므로, 미등록(혹은 비등
록) 청년예술가들을 눈여겨 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작년 12월 서면에
서 열린 <제1회 마우스 북페어>가 그 사례다. 부산·경남 지역 최초의 독립출판 축제로, 지자체의
지원을 통하지 않고 예술가들이 사비를 털어 자력으로 이뤄낸 행사였다. 100개가 넘는 부스가 빼
곡히 채워졌고,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이나 ‘예술인활동증명’과는 무관하게 모두가 서로의 출
판물을 응원하고 서로를 예술가로 존중하며 평등하고 아름다운 축제를 펼쳤다. 부산이 좋아 부산
에 살면서 ‘지원제도 바깥에서’ 활동 중인 예술인들을 어떻게 뒷받침해줄 것인지. 이 숙제를 꼭 풀
어주시길 바란다.

 

청년예술인, 노인과바다, 교류와 재발견, 부산의 문화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