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아카이브

HOME 정책아카이브 문화정책이슈페이퍼

해당메뉴 명

메뉴 열기닫기 버튼

문화정책이슈페이퍼

[이슈]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틈에, 봄은 왔다

발행일2020-04-20 발행처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첨부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틈에, 봄은 왔다.
- 사회적 안전망이 닿아야 할 곳들 -

김건우(대안문화행동 재미난복수 대표)

 

...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오고, 꽃이 폈다. 흩날리는 꽃잎 따라 배시시 콧바람 보탤 적에도 두려움과 불안함이 함께 인다. 하얗게 떨어지는 벚꽃이 무상하게 거리는 비었다. 밟지 않은 꽃잎만 곱게 날린다. 봄의 지척에 있는 상점, 식당은 하릴없이 봄의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봄의 기운에 들뜬 사람들도 찾기 힘들고, 그와 함께 여지없이 울려 퍼질 노래들이, 노래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3월은 갔고 4월을 맞았다. 많은 경우에 재난 상황은 함께 함으로 극복해 왔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만남 자체가 위험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여기서 이는 이질감과 공포. 온라인을 통해서 접하는 정보에 의존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개인의 불안함과 무력감은 그 빈도에 비례해서 커진다. 한산한 거리와 비어있는 점포들, 자영업자들의 위기로부터 중소기업, 대기업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경제 공황사태에 대한 두려움이 여기에 가중되어 어지럽기까지 하다.

 사람들의 만남, 특히 많은 집객을 목표로 하는 공연예술계의 타격도 심각하다. 얼마 전 3월 부산 공연예술계 총매출이 11만 원에 그쳤다는 기사를 접했다. 2020년 1월 47억 원에 비하면 사실상 매출이 없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수많은 행사, 축제가 줄줄이 취소되고 기약 없는 연기를 하는 가운데, 이를 생산하는 자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가 육체적, 심리적 불안에 이어 경제적 불황에 대한 공포로 격양되어 가는 가운데 오히려 들춰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위기가 일상이 된 예술인들에 대한 이야기

 

 이번 봄은 확연히 다르긴 하다. 하지만 내겐 겨울을 지나며 겪는 고독과 불안함, 그리고 이 배고픔이 그리 낯선 일상은 아니었다. 주변 지인들 대부분이 지역에서, 그리고 메이저가 아닌 독립 혹은 비주류 예술가로, 20대에서 40대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통계에의 대상이 되고, 지원의 근거가 되는 자료들은 실상 연극, 뮤지컬, 클래식, 오페라, 무용, 국악 등 극장과 단원을 보유한, 그나마 매출이라는 통계치를 낼 수 있는 단체, 개인에 한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서 조차 잡히지 않는 많은 이들이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지금껏 버텨 왔던, 그리고 또 견뎌야 할 겨울에 대한 이야기가 더해져야 한다.

 2018년 문체부에서 발표한 예술인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예술인 10명 가운데 7명은 예술 활동으로 벌어들이는 한 달 수입이 100만 원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순수예술 활동으로 연평균 수입 1,281만 원을 번다. 이 통계는 예술인 복지법에 근거한 예술인으로 등록된 5,002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 또한 건축가등 소득 수준이 높은 직업군이 포함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수요가 많은 수도권 인원과 40대 이상 기성세대 예술가도 포함된 평균치이다. 이 통계에서 주목할 점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평균 수입 제로(0원)인 29%의 예술가들이다.

 가난하니깐 예술가다 느니, 이렇게까지 배고프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예술가를 대하는, 혹은 예술의 사회적 인식과 필요성에 대한 부분을 짚고 가야 한다. 2010년 기준 48년간 직업별 평균 수명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종교인이 가장 장수하며, 예술인, 체육인, 작가, 언론인은 평균 수명 70세에 못 미치는 최하위를 기록했다. 실존과 진실을 찾는 일을 함은 비슷할 진데 종교인과 확연하게 수명차가(10년 이상) 나는 이유가 뭘까? 많은 이유가 포함되겠지만 문득 떠 오른 차이는 고용에 대한 안정성과 사회적 인식 차이가 아닐까? 즉 사회적 안전망 밖의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 단명 그룹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져 고용이, 아니 생존에 대한 불안이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면 어떨까? ‘실존과 진실을 찾는 일을 하며 보다 많은 이들이 삶을 탐구하고 창의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으며 보다 행복하고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낭만적 상상을 해 보기도 한다. 보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보다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 작동되어야 할 시스템은 낭만적 상상력을 현실화하고 구체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안전망이란 것이 갖춰진다.

 

낭만적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

 

 코로나19의 창궐 이전과 이후, 우리의 삶은 확연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이질적인 불안함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상황이기에 그 당혹감은 더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불평등과 배제, 차별과 착취의 구조 속에서 반복되어 왔던, 사회 시스템 조차 적용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상황이 다르다. 이 파괴의 고리는 사람, 동물, 자연을 가리지 않았고 지금 우린, 전 세계적 위협을 맞이하고 있다. 실은 우리가 충분히 미연에 발견하고 확인하여 대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최근 10년간, 국가적 재난이라 부를 수 있는 상황들을 돌이켜 보면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사회안전망의 허술함을 토로하는 것이 순서처럼 느껴진다. 허나,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두 달 남짓, 코로나19는 가장 연약한 구조에 있는 것부터 할퀴고 있다. 영세 자영업자, 그에 속해 있는 노동자. 그리고 조그만 작업실과 연습실을 꾸려 창작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 벌써부터 이들이 쓰러지고 있는 소리가 허다하게 들린다. 특히 임차로 생계의 터를 마련하고 있는 이들에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영세한 이들에겐 이 시기를 버틸 만한 담보도 없기에 대출도 힘들다. 동네 조그만 상점들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는 식당, 길에서 혹은 지역 축제에서 노래들을 수 있었던 예술가들부터 쓰러지고 있다. 실태 조사에서 조차 외면받고 배제되었던 이들의 삶이 소리 없이 쓰러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차원에서, 많은 지자체에서도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책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에 반해 예술계에서 발표된 대책은 코로나19가 진정되면 300만 명에게 8,000원씩 관람료 할인권 지원, 행사 취소, 연기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30억 규모의 예산 편성, 소극장 200여 곳과 공연예술단체 160곳 선정하여 운영비 일부를 지원하는 정도의 계획이 눈에 띄는 실정이다.
 여전히 예술계에 대한 사회안전망의 허술함, 그 태도에 대한 인상이 가시질 않는다. 3월 23일 독일의 문화부 장관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500억 유로(한화 67조) 규모의 문화예술계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창조할 기회를 잡아야 할 시기이며, 이는 예술가가 없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지금은 필수적이다.’라고 문화예술 지원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코로나19는, 사회의 가장 연약한 부분부터 할퀴어 상처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부의 양극화는 더욱 가속될 것이라는 불안이 엄습한다. 세상은 더 거대하고 많이 가진 자들에 의해 더욱 빠르게 시스템화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도. 이 끝나지 않은 겨울은 자영업자들 보다는 대기업이 버틸 수 있는 확률이 크기 마련이다. 예술계 또한 거대 기획사 혹은 방송계가 지니고 있는 자본력과 비대면 유통이 가능한 시스템, 플랫폼을 획득한 자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크다. 이렇게 되면 지금껏 만들고 있던 문화적 민주주의, 다양성 또한 급속도로 사라지는 사회가 진행될 위험이 크다. 만남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문화, 경제, 사회, 자연)를 기대하기 힘들어 질 수도 있다.
 
 2020년의 4월, 아니 끝나지 않은 겨울. 우리는 다시 ‘역사는 진보하는가?’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앞에 섰다. 단순히 지원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껏 만들어 오고 있던 시스템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우리 사회의 선택들이 불거져 오게 한, 이 보이지 않는 적들과의 싸움에서 결국 역사와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지를 묻는 엄중한 심판의 시기인 것이다.
마스크 너머의 세상을 향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들의 용기를 발견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예술가이기 때문에 보호, 지원 받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구축하고자 하는 안전망이 차별과 혐오, 착취와 배제를 넘어 보편적으로 닿을 수 있을 때, 그곳에 예술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낯설지만 날 선 눈을 가지고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손을 잡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들. 그들은 그곳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그리며, 춤추고 있다. 앞으로 마주 할, 더 많은 종류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희망하는 만남의 노래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틈에 봄이 온 까닭이다.

 

김건우, 문화정책이슈페이퍼,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