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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복지]사회복지사가 보는 문화예술

발행일2020-04-20 발행처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첨부파일

예술+○○ : 예술+복지

사회복지사가 보는 문화예술

윤성호(동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나는 사회복지사다. 인간화(humanization)는 사회복지의 목적이다. 브라질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의 개념어인 인간화와 맥이 같다. 모든 억압에서 벗어난 주체인 인간으로 살기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에스핑-안데르센(Esping-Andersen)은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라는 말로 사회정책을 설명한다. 어려운 말 같지만 ‘사람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상식을 정책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본주의자 매슬로우(Maslow)가 인용하고 추구한 ‘자아실현’은 인간화의 구체적 모습이다. 클레멘트 코스*로 현대 인문학 대중운동을 열었던 얼 쇼리스(Earl Shorris)가 요구한 ‘위험한 시민’ 역시 동일한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 중심 문화화에서 생명 중심 문화화로 도약해야 한다. 현대 사회복지가 추구하는 바다.

 

사회복지의 최대 적은 ‘수치심’이다. 불평등과 상품화는 서로를 견인하여 배제하는 사회를 만든다. 배제적 사회라는 괴물은 인간의 수치심을 먹고 산다. 누가 누구를 수치스럽게 하는가는 괴물 권력의 척도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의 항구적 대립 이면에는 수치심을 사용하고 기생하는 자와 수치심에 갇힌 자의 긴장이 박혀 있다. 사회복지는 ‘가장 선별적인 욕구를 가진 사람을 수치스럽지 않게 하는 보편적 전략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출발한다. 기존의 보편복지와 선별복지 논쟁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수치심’으로부터의 자유는 생명 존중이라는 문화 토대 구축으로부터 가능하다.

 

사회복지는 품위있는 사회를 추구한다. ‘수치심’따위를 가지고 힘을 내세우는 천박한 사회를 거부한다. 삶의 품격은 품위 있는 사회가 낳는다. 품위 있는 사회는 고결한 문화를 만들어서 모든 이와 공유하는 아량이 있다. 사회복지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부터 최상위 욕구까지 자유로이 욕망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근대 사회 정책가들은 귀족이 소유하고 누리던 빌라와 궁전을 모든 시민에게 살게 하려는 욕망이 있었다. 사회주택으로 실현하였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현대식 부엌은 마가레테 슈테-리호츠키(Margarete Schuette-Lihotzky)가 디자인한 '프랑크푸르트 부엌'으로 시작한다. 현대 아파트와 시스템 주방은 자산과 계급의 상징이다. 시작은 무산자를 비롯한 모든 시민에게 궁전을 열고, 가사노동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려는 노력이었다. 슈테-리호츠키가 테일러리즘에 매몰된 디자이너가 아니다. 기술과 예술을 통해 모든 시민이 품위를 유지하기를 바랐다. 예술과 예술품과 예술문화를 영위하는 자격은 모든 시민에게 있으니까. 품위 있는 예술적 사회가 주는 삶의 품격,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 만드는 생태계. 예술문화와 사회복지는 상보적이다.

 

내게 문화예술은 개념적으로 이해하기 무척 까다로워 어렵다. 경직과 이완, 창발과 모방, 각성과 적응, 주체와 연결, 고립과 독립, 충격과 탄성, 사적 자유와 공적 평등... 이항 대립적 개념이 마구 섞여 있어 복잡하기 그지없다. 개념적 이해와 별개로 문화예술이 미치는 힘은 강력했다. 소통과 관계의 힘은 무엇보다 컸다. 제대로 된 문화예술을 맛본 이들의 수많은 얼굴들에서 빛과 윤이 나는 것을 보았다. 새로운 생명력을 깨닫게 하거나 부여하여 일으키는 사례를 많이 만났다. 굳이 엘 시스테마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행위자가 사회적 영향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행위의 치밀함만 있으면 자연스레 발휘되는 영향력이었다. 인간화 과정에서 한 단계 도약한 생명화 작업에 대한 영감을 문화예술판에서 얻었다. 문화예술은 그 자체로서 사회적 가치가 충분하며, 기획과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현장 예술 판을 옆에서 넌지시 본 바를 부연한다. 레드 오션이 아니라 레드 슬럼에 가깝다. 레드 오션이야 출혈 경쟁하는 시장이지만, 레드 슬럼은 이해관계를 고착하여 약육강식이 자연스러운 폐쇄공간이다. 현장예술 판에서 살아 움직이는 몸짓들만 봐도 가히 존경스럽다. 하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다른 현장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불평등이 심하다. 인간화와 상품화 간의 간극이 너무 좁아 긴장을 떨쳐낼 수 없다. 쓰레기통에서 피어난 장미는 무척 아름답다. 그 장미를 보자고 쓰레기통을 집안으로 모셔올 필요는 없다. 황무지를 갈아엎어 비옥한 토양을 만들면 더 많은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

 

* 클레멘트 코스: 1995년 뉴욕에서 시작된 노숙인, 마약 중독자, 재소자, 전과자 등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교육과정

윤성호, 부산문화재단, 정책이슈페이퍼, 정책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