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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진 1964-2024

발행일2024-03 발행처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무진 1964-2024

박 소 윤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센터장, 부산대학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 협동과정 겸임교수

 

   무진(霧津)은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가야 하는 바닷가 지역이다. 안개로 자욱한 그곳은 대부분의 비수도권 지역이 갖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쓸쓸함의 은유다.
   김승옥이 1964년 발표한 단편소설 『무진기행』의 주인공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중 잠시 고향 무진에 가게 된다. 가난한 폐병 환자였던 지난날, 몸서리치게 떠나고 싶어 했던 그곳이다.
모임에서 우연히 젊은 날의 자신처럼 이 쓸쓸한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가기를 열망하는 하인숙을 만난다. 처음 만난 ‘나’에게 몸을 연 하인숙이 욕망하는 것은 ‘나’를 통해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서울이다. 무진에 살았던 ‘나’도, 무진에 살고 있는 하인숙도 서울은 욕망하는 그 모든 것으로 표상된다.


   무진의 청년들은 왜 그토록 서울에 가 닿고 싶었을까.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 주창하던 것은 조국 근대화였다. 근대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시대는 넓다. 중세 때 교회 문헌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화는 이 근대라는 단어 안에서 꿈틀거리며 각 시대 들을 열어왔다.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는 산업화를 의미했다. 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71) 때만 해도 농업정책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었으나 3차 경제개발 5개년 (1972~1976) 계획에 접어들었을 때는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군부독재의 중앙집
권적 체제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중심지로서의 서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산업화 전략은 농?어촌 중심의 지역사회를 빠르게 해체 시켜갔다. 지역의 패기 넘치는 청년들은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하고, 지역에서 거주하던 청년들도 서울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서울은, 무진과는 달리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역을 어떻게 대해왔을까. 「지방자치법」은 1949년 7월 제정된 후 2024년
5월까지 총 72회의 개정과정을 헤쳐나왔다. 75년간 무려 72회에 이르는 개정은 지역에 대한 정치적 계산, 혹은 고심이 많았음을 알게 한다. 지역문화와 관련한 최초의 흔적은 1951년 이승만 정부 당시 시작된 지방문화원이다. 이것은 1960년까지 20개소로 늘어 났다가 박정희 정부 때인 1970년대에는 124개소로 확대되었다. 이 지방문화원을 받치는 법이 1965년 7월 제정된 「지방문화사업조성법」이었다. 이 법의 제2조에서 명시하듯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시책 및 업적을 그 협조하에 일반에게 주지시키는 사업, 향토문화를 계발?보급?선전하는 사업, 외국의 문화기관과의 협조하에 민주 우방 제국의 문화를 소개?선전하는 사업이 이 법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볼 때, 지방문화원이 지역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문화발전을 이루기 위해 작동했다기보다는 정부의 문화정책을 전달하고 선전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법은 1994년 7월 「지방문화원진흥법」이 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마침내 행정수도를 세종시로 옮기고 광주, 경주, 전주, 부여?공주에 문화도시를 조성하였다. 지역문화와 관련한 법 제도도 정비하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1월 「지역문화진흥법」을 제정하고, 2016년 5월 지역문화진흥원을 개원하였다. 현 정부는 2023년 7월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지방분권 균형발전 5개년 계획을 수
립하는 등 정책적 노력을 하고 있으나, 가파른 인구 소멸과 청년인구의 수도권 이주로 인한 비수도권의 지역소멸을 멈추게 하기에는 숨이 가쁘다.


   무진은 실재하는 지명은 아니지만 60년대 이후, 비수도권 지역 대부분이 무진일지도 모른다. 2024년의 지역은 1964년의 그곳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소멸 위기에 처해있다. 일자리, 출산 장려 등 여러 정책을 내지만 청년들에게 닿지는 않는다. 그 제도들이 자녀 1명당 얼마 주겠다는 식의 기계적인 목적 달성과 단기 성과 중심으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용도나 목적에 의한 ‘본질’이아닌, 그 존재만이 중요한 ‘실존’임에도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자원이니, 비용이니 라는 식으로 그 존엄성을 폄훼 시키고 있다. 인생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일자리가 아닌 간헐적이고 단기적으로 제공되는 비정규 일자리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그 자체로 환대하지 않고 효용자원으로 대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 청년들은 비출산으로 저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청년인구의 대도시 이주는 단순히 일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춘천, 진천, 음성, 태안, 순천, 창원, 울산 등 여러 산업도시가 있긴 하지만 여기가 청년들이 선호하는 도시는 아닌 것 같다. 청년들은 주중에 일만 하고 여가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보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재미 즉 문화이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공연, 전시와 같은 문화예술뿐 아니라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로, 공원, 카페, 펍, 책방 등은 그들에게 정주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요건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철학이다. 사람을 환대하고 그들이 가진 다양
성을 포용하는 진심 말이다.

무진, 지역소멸, 지역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