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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근

공연예술인 음악 양악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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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상근

  • 이름이상근 / 李相根
  • 생년월일 1922년 1월 16일
  • 출생지진주

인물소개

  • 2013년 1월 인물스페셜


    이상근(李相根)


    □ 출생과 수학(1922~1946)

    이상근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진주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언론인이었던 아버지(이봉길)의 음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 덕분에 선생은 어릴 때부터 유성기를 통해 음악적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 진주중학교 시절에는 이웃마을 교회당에서 오르간을 접하게 되고, 하모니카를 부는 방법을 스스로 체득하기도 했다. 진주시는 (사)이상근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켜 지난 2008년부터 <이상근음악제>를 개최하였고, 최근에는 국제음악제로 발전시키고 있다.
    일제 말엽인 1943년 이상근은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당시 일본에 소개되고 있던 인상주의와 민족주의적 작곡 경향을 배운다. 그러나 작곡가로서의 소질과 경향은 이미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인 18세 때 쓴 가곡인 ‘해곡’(海曲)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선생의 오랜 동료였던 원로 음악가 제갈삼 선생(1925~)의 회고에 의하면 ‘반음계적인 기보법에 의한 다분히 묘사적인 반주 부분은 그의 음악적 소양의 수준을 감안할 때 이미 18세 때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것이었다. 선생은 서양의 20세기 작곡기법에 한국적 요소를 가미하여 한국음악의 씨알을 뿌리고 있었다.


    □ 중등학교 교사(1946~1958)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선생은 마산여중 교사로 부임한다. 2년 남짓한 마산여중 근무를 마감하고 49년 봄에는 고향인 진주사범학교로 근무지를 옮긴다. 여기서도 1년 반 남짓한 짧은 기간 일했지만 이 기간 동안 김춘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 ‘가을저녁의 시’가 탄생한다. 김춘수 시인은 당시 마산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50년 10월 이상근은 다시 마산여고로 근무지를 옮긴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는 학교가 군 기관으로 징발되고 교사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는데, 선생은 미군 군수품 천막을 지키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51년 겨울에는 선생의 첫 작곡발표회가 마산 <부림극장>에서 열렸고, 이듬해인 52년 12월에는 부산 부민동 이화여대 강당에서 제2회 작곡발표회가 열렸다. 당시는 부산이 임시수도였기에 중앙 무대 데뷔 발표였던 셈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되면서 이제 갓 30대에 접어든 청년 이상근은 마침내 부산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부산과 본격적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이 자리가 윤이상의 후임이었으니, 당시 부산고 학생들은 정말 대단한 음악가들에게 음악을 배운 셈이다. 이 학교에서 58년 3월까지 근무했으니 4년 남짓한 기간인데, 이 시기에 이상근은 ‘팀파니와 현악합주를 위한 콘트라스트’, ‘피아노협주곡 제1번’, ‘교향곡 제1번’, ‘교향곡 제2번’ 등 대규모 기악곡들을 남긴다.


    □ 교육대학 교수(1958~1974)

    1958년 부산 지역 대학에서 음악과가 부산사범대학에 처음으로 개설되었고, 선생은 고태국, 김창배 등과 함께 교수진으로 발탁된다. 10여 년의 중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대학교수로서의 새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 9월부터 1년간 이상근은 미국 피바디음대 대학원 과정으로 유학한다. 탱글우드 하계음악학교에서 A.코플랜드의 지도하에, P.힌데미트의 범온음계주의와 J.케이지의 우연성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후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선생은 유학 당시인 59년, 30대 후반의 나이에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는데, 요즘 이 상을 받는 분들의 연배가 대체로 60대 이후라는 점을 생각하면 시대적 여건이 다른 점을 감안하더라도 좀 놀랍다.
    부산사범대학은 62년 해체되고 교육대학으로 흡수된다. 선생도 자동적으로 교육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여기서 근무했던 12년간이 그의 창작 활동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유치환 시에 의한 연가곡 “아가(雅歌)I”, ‘교향곡 제3번’, ‘교향곡 제4번’, ‘교향곡 제5번’, ‘피아노협주곡 제2번’, 그리고 이른바 ‘조우(遭遇)’ 시리즈와 ‘투영(Projection)' 시리즈 등 성악곡 26곡과 기악곡 15곡이 이 시기에 탄생한다. 이 시기에 기억할 만한 또 하나의 일은, 선생이 대구 지역의 효성여대와 계명대학교에 간간이 출강하여 후학을 양성한 사실이다. 현재 대구 지역의 원로 음악가인 우종억, 임우상 등이 초량동에 있었던 선생의 자택까지 와서 작곡 레슨을 받았다. 72년에는 눌원문화상, 75년에는 한국작곡상을 수상한다.


    □ 부산대학교 교수(1974~1987)

    1974년 이상근은 또 한 번의 전기를 맞게 된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내에 음악교육과가 개설되면서 교수로 발탁된다. 그는 여기서 약 13년간 근무하면서 오랜 교단생활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처음으로 대작인 칸타타 ‘분노의 물결’과 오페라 ‘부산성 사람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칸타타 ‘분노의 물결’은 부산시 개항 100주년 기념으로 부산시향이 위촉한 작품으로, 우리들 가슴에 응어리진 분노를 토로하고 있다. 그의 유일한 오페라 ‘부산성 사람들’은 86년 서울아세안게임과 제7회 부산시민의 날 기념으로 위촉되어 제9회 부산무대예술제에서 초연되었다. 부산의 원로 연극인 박두석의 대본으로 부산 작곡가에 의해 창작된 메이드 인 부산 토종 오페라의 공연은 그 예술적 깊이를 논하기 이전에 부산 문화사에 큰 획을 그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작곡 활동 이외에도 <프로무지카>라는 실내악 단체를 82년 창단하여 10여 회 연주활동을 함으로써 척박하던 지역 실내악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87년 2월 정년퇴임을 하며 그는 ‘교수의 진가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것은 결코 총장이나 학장이 아니라 오직 학생들일 뿐이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 정년퇴임 이후(1987~2000)

    정년퇴임 이후에도 그의 창작 활동은 계속되었다. 유치환 시에 의한 연가곡 “아가(雅歌)I”을 작곡한 지 19년 만에 신달자 시에 의한 연가곡 “아가(雅歌)II”를 탄생시킨다. 또한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제6번 ‘한국의 춤’은 95년 부산시향 제310회 정기연주회에서 반초 차브다르스키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한국인의 한, 슬기, 멋, 힘 등을 담아 선생의 작곡인생을 총 결산하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스스로 회고했다. 이외에도 합창곡인 ‘한국의 꽃’을 피아노곡과 실내악곡으로 편곡하고, 관현악곡으로 ‘축전음악’, ‘투영’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투영 III’도 이 시기에 태어난다.


    □ 회고-영남악파의 거목

    이상근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짧게 요약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진주에서 태어나 20대까지 고향과 마산을 오가며 음악교육 활동을 했으나, 30대 초부터 50년 가까운 세월을 부산에 정착하여 활동했으니 그는 필경 부산 사람이다. 요즘도 쉽지 않은 외국 유학을 일본과 미국 두 곳에 다녀온 선각자이며 윤이상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대 작곡가 반열에 있음에도 그는 평생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척박한 지역문화 탓하며 얄팍한 능력에 기대어 서울로, 외국으로 짐 싸서 떠나가는 지역 예술인들과는 삶의 궤적이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의 제자와 지인들이 입을 모으는 것은 삶에 대한 그의 성실하고 책임 있는 자세였다. 수업시간에는 항상 학생들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언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근검절약을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하는, 그래서 그는 작곡 기술만이 아니라 참 인간으로서의 삶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제자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다.
    말년에 고혈압으로 한쪽 눈의 망막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학생들과 무리하게 고음을 내다 병세가 악화되어 마침내 실명하게 된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난 94년 선생을 자택에서 뵈었을 때 이미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계속 작곡을 하고 계셨다. 마지막 곡인 ‘교향곡 제6번’이었을 것이다. 미완성된 악보였지만 악보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웠다. 헤어질 때 선생은 서재로 들어가시더니 표지가 너덜너덜한 책을 한 권 건네주셨다. ‘이제 이 책은 김선생이 가지고 있는 게 더 좋겠어!’ 뭔지도 잘 모르고 엉겁결에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 당신께서 1959년 10월 미국 유학 시절 내쉬빌에서 구입하여 평생 간직해 오던 장서 "A dictionary of musical themes". 속표지에는 ‘김원명님께 1994/3/29 이상근’이라 적혀 있었다. 이 책을 주신 선생의 깊은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으랴. 하직 인사를 드리니 필자를 바래다주는 것처럼 하며 사모님 몰래 살짝 아파트 1층으로 내려오셔서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 너무나 인간적인 거장의 모습이었다.
    이상근은 이언도, 강순희, 임종길, 최인식, 조희주, 하오주, 김종태, 조영윤, 하순봉 등 세기 전환기 부산지역 작곡계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작곡가 모임인 <향신회>는 물론 우종억, 임우상 등 대구지역 제자들까지 포함된 이른바 영남악파의 거봉으로 지금도 우뚝 서 있다.
    지난 1988년 지방 음악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한 이상근. 그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지역음악인이 어떻게 지역을 위하여 활동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어떻게 지역을 뛰어넘어 활동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좋은 본보기다. 이제 이상근에 버금가는 음악인이 언제 다시 부산에 나타날 지 아무도 기약할 수 없다. 그러나 부산이 이상근을 가졌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행운이다.


    ※ 참고문헌


    이상근, 『우리歌曲 試論』, 1955
    민족음악연구소, ‘이상근의 삶과 작품 1: 삶’, 『음악과민족』제5호, 1993
    부산원로음악가회(대표집필 제갈삼),『초창기 부산음악사』, 세종출판사, 2004
    조선우, ‘이상근의 작품연보와 그 생성 및 수용사’,『음악과민족』제6호, 1993
    정혜민, ‘이상근의 음악관-그의 논문을 중심으로’, 『음악과민족』제6호, 1993
    손금숙, ‘이상근의 음악관-그의 비평글을 중심으로’, 『음악과민족』제6호, 1993
    최인식, ‘이상근의 작품론-“조우”시리즈’, 『음악과민족』제7호, 1994
    김종태, ‘이상근의 작품론-피아노곡’, 『음악과민족』제7호, 1994
    임종길, ‘이상근의 작품론-합창곡’, 『음악과민족』제7호, 1994
    정양섭 외, ‘이상근의 작품론-오페라’, 『음악과민족』제7호, 1994
    김광자, ‘이상근의 작품론-실내악’, 『음악과민족』제7호, 1994
    선신주, ‘이상근의 작품론-관현악곡’, 『음악과민족』제7호, 1994
    김원명, ‘다른 사람이 본 이상근의 예술세계’, 『음악과민족』제7호, 1994
    제갈삼, ‘이상근의 음악적 삶’, 『음악과민족』제25호, 2003
    김종태, ‘영남악파의 거목, 이상근’, 『음악과민족』제25호, 2003
    우종억, ‘인간 이상근의 나에게 누구인가?’, 『음악과민족』제25호, 2003
    강순희, ‘작곡가 이상근을 추모하며’,『음악과민족』제25호, 2003
    최인식, ‘스승님께 드리는 편지’, 『음악과민족』제25호, 2003
    신영순, ‘나의 스승 이상근 선생님을 추모하며, 『음악과민족』제25호, 2003
    한경진, ‘연가곡 '아가 I'을 중심으로 살펴본 이상근의 예술가곡,
    (사)이상근기념사업회,『작곡가 이상근 작품 세미나 자료집』, 2009
    하순봉, ‘이상근 피아노작품에 나타난 음고에 관한 연구’,
    (사)이상근기념사업회,『작곡가 이상근 작품 세미나 자료집』, 2009
    공정배, ‘성악가 입장에서 살펴 본 이상은 가곡의 소고’,
    (사)이상근기념사업회,『작곡가 이상근 작품 세미나 자료집』, 2009
    조선우, ‘「이상근 국제음악제」의 짧은 역사와 전망-학술대회를 중심으로’
    『음악과민족』제41호, 2011
    최금뢰, ‘이상근 가곡 연구:글로벌한 한국가곡의 확립을 위하여’, 서울대박사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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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 : 김원명(경성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문학박사(음악학) / 문화일보 신춘문예 음악평론 당선 / 부산음악평론가클럽 대표 / 한국음악응용학회 회장 / 부산시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 경성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 부산문화재단 비평지 <공감, 그리고> 편집주간



주요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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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활동사항 - 년도, 활동내역,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년도 활동내역 비고
1994 교향곡 제6번
1992 연가곡 ‘아가 II’(신달자 시)
‘한국의 꽃’
1991 축전음악 ‘신정·희망’-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88 목관5중주를 위한‘희유곡’
1987 ‘사계절의 노래’- 합창곡
‘파랑새 변주곡’- 파랑새 변주곡
1983 ‘부산성 사람들’- 오페라
1981 ‘projection No.2' - 피아노곡
1980 대금, 가야금을 위한 조우
1979 교성곡‘분노의 물결’/ ‘무악 79’-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77 ‘한국의 꽃’(조순 시) - 합창곡
1976 ‘축전서곡’-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75 ‘청산별곡’(고려가사) - 합창곡
1974 ‘projection No.1' - 피아노곡
피리, 아쟁,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우
1973 소프라노와 가야금을 위한 조우
가야금, 대금,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우
1970 두 대의 가야금을 위한 조우
1969 현악4중주 제2번 / 소프라노와 실내악을 위한 ‘네 계절의 노래’-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68 ‘즉흥곡’/‘환상모음곡’- 관현악 및 실내악곡
여성합창곡 ‘사계절의 여심’
교향곡 제5번
1967 ‘환상조곡’- 피아노곡
‘사계절의 노래’- 합창곡
교향곡 제4번
1966 피아노와 현을 위한‘콘체르토 그로소’- 관현악 및 실내악곡
피아노를 위한‘improvisation'
1965 금관과 현을 위한‘희유곡’-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64 첼로를 위한‘모자이크 조곡’-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63 교향곡 제3번
1962 목관과 현을 위한‘희유곡 -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58 피아노협주곡 제1번 / 현과 소프라노를 위한 ‘세 폭의 그림’- 관현악 및 실내악곡
교향곡 제2번
1957 팀파니와 현을 위한 ‘콘트라스트’-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56 교향곡 제1번
1954 콘체르트 아트레 -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52 피아노트리오 제1번 -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51 석류’(김세익 시) - 합창곡
피아노 전주곡 -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50 연가곡 ‘가을저녁의 시’(김춘수 시)
1949 현악4중주 제1번 -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47 ‘산, 나그네, 임’-합창곡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 - 관현악 및 실내악곡
1946 ‘새야 새야 파랑새야’- 합창곡
1940 ‘해곡’(양주동 시)-가곡

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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