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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달석

시각예술인 회화 서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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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양달석

  • 이름양달석 / 梁達錫
  • 생년월일 1908년
  • 출생지경상남도 거제군
  • 자택주소 동래구

인물소개

  • 2013년 4월 인물스페셜

    I. 양달석(梁達錫 1908-1984)은 평생 동안 붓 한 자루에 의지해서 가족들을 부양하며 작품으로 생활을 한 보기 드문 전업미술가였다. 그리고 부산근대미술을 개척한 1세대 작가로서 1930년대 초부터 부산·경남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40년에 동인운동의 효시인 ‘춘광회’(春光會/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양달석, 일본인 2명)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공간과 여명기 부산미술의 살림살이를 이끌어간 초대 부산미술협회 회장(1946-53)을 맡았다. 그가 부산과 인연을 맺고 정착하여 미술계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1940년경이다. 1942년 ‘부산미술전’(일어판 부산일보 주최) 서양화부에서 작품 ‘초원’으로 최고상인 ‘부산 부윤상’을 받으면서 기반을 잡게 되었으며, 지금의 서면에 주거를 겸한 화실을 마련하고 부터다. 이후 온천동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부산에서 활동한 토박이 미술가로 살았다.


    II. 그의 주된 작품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친할 수 있는 목가풍의 전원을 배경으로 소와 목동, 초가, 개울과 풀밭 위에 뛰어 노는 아이들이 등장하며, 아롱다롱한 단청 빛깔의 꿈결 같은 분위기로 어우러져 밝은 ‘낙원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마치 동화나 동요의 세계와 같은 천진함과 기쁨이 흐르는 건강한 화풍을 지니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민요화가’였던 탓으로 초창기의 어려웠던 시절에도 아껴주는 이들이 수월하게 있어서 그림으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자신이 성장하고 살아온 영남지방의 자연과 풍광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우리 전통미술이 지닌 맑고 밝고 풍만한 미감과 민화풍의 색채감을 서구의 유채화법으로 자기화하여 ‘목가적인 화풍’으로 형상화한 점이 돋보인다. 6·25전쟁 당시 부산의 산언덕배기에 즐비한 판자촌과 자갈치와 포구의 신산한 삶, 오륙도가 보이는 해변에서 소등에 올라 탄 목동과 물가의 소년들을 그린 ‘바닷가의 목동’, ‘초가집 가게’들마저 꿈의 정경으로 이상화시키고 있다.


    III. 양달석은 1908년 경남 거제군 사동면 사동리에서 3남1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집안 대대로 이어온 한의사였다. 그러나 9세 때 부모를 여의고 백부집에서 소먹이는 목동의 머슴살이를 하며 지냈다. 평생 동안 화폭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 소와 목동도 머슴살이시절 소를 잃고 집에서 쫓겨나 산에서 밤을 지세고 새벽에 소를 찾았던 순간의 감격과 설움 등 유년기의 가슴 아픈 체험이 승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16세 때 통영군 사립 강습소에 입학하여 첫 미술시간에 그린 ‘연꽃’ 이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받으면서 그림에 눈을 떴다. 그리고 통영보통공립학교 4학년생이던 18세 때 ‘전조선 소년전람회’에 출품된 ‘통영’이 일등으로 당선되어 전교 조례에서 시상되는 기쁨을 갖게 되면서 장래에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림에 대한 두각은 진주농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일본 오사카신문사가 주최한 ‘전일본 중등학생 미술전람회’에서 ‘농가’가 특선을 하면서 나타난다. 그러나 당시 미술활동을 반대하던 담임과 백부의 몰이해로 시상 통보를 나중에야 알려준 처사에 실망하여 농업학교에 대한 애착심이 사라지고, 그 무렵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에 자극 받아 교내 동맹 휴학을 주동한 혐의로 퇴학을 당하고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학교를 그만 두고 실의에 빠진 그의 처지를 이해해준 동향의 규수 진낙선(陳洛先, 당시 진주중학 재학)을 만나 사귀다 1930년(22세)에 결혼을 하게 된다. 그의 부인은 뒷날 작품생활에 있어 정신적인 동반자였으며, 어려운 고비마다 화가로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좌절의 시기에 용기를 주었으며 생활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결혼 후에는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청강생)하여 신문배달, 초상화를 그리면서 고학을 했으나 학비조달의 어려움과 건강악화, 고향에 남겨 둔 가족의 생계 등으로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후 사동면 면서기로 3년간 근무하면서 틈나는 대로 그림을 계속하였으며,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출품하여 3회 입선하였다. 만주로 피난 가는 농민가족의 애환을 그린 ‘전원의 사랑’(11회, 1932년), 스러져가는 전통예인들의 삶을 다룬 ‘가두의 예인단’(17회, 1938년), 농악대의 기운찬 생명력을 과시하여 농악을 통해 한국 농민들의 저항을 표현한 ‘풍년제’(18회, 1939년)가 그의 입선작품의 내용이다. 당시 ‘선전’의 화풍이란 거의가 인물 좌상, 정물, 풍경 등 정태적인 소재를 갓 도입된 서구화풍으로 소화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에 비해 양달석의 화풍은 그 주제나 소재부터 남달랐다. 쓰러져가는 농가의 비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농가’(1940년)가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과 어긋난다는 취지에서 낙선되자 마침내 선전과 결별하게 된다.
    선전과 결별한 후에는 면서기를 그만 두고, 1940년 부산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족과 함께 건너가서 부인은 삯일을 하고, 자신은 ‘동경공업기술학교’ 제도과에서 공부하며 졸업과 동시에 정밀기계연구소에 취직한다. 그러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그리기를 계속하면서 작품활동에 대한 꿈을 이어갔다. 이 무렵 그는 화구를 사러간 백화점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흑백의 돌바닥에서 ‘얼룩의 필법’을 발견하고, 이 필법으로 제작한 작품 ‘고향’(1941년)과 ‘산촌의 가을’(1942년)을 ‘독립미전’에 출품하여 각각 입선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 당시 우리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던 서양화와 일본화풍을 탈피하고자 자기 특유의 양식을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어느 민족의 예술문화가 영원불변한 것은 그 민족 고유의 특질이 확연하였음에 기인한 것”이라 판단하고, 자기 작품이 “한국적이냐 아니냐”를 놓고 고심한다. 그래서 일제하의 저항적이고 현실고발적인 분위기를 버리고, 목동의 얼굴을 둥근 공과 같이 귀염성 있는 쪽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전통미술의 낭만적인 곡선미를 원용하고, 범어사(梵魚寺)를 찾아가 사찰의 단청이 지닌 장식적인 색감과 불화(佛畵)의 조형적인 특성들을 연구하여 자기의 화풍으로 수렴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미술이 지닌 미감과 미의식을 교감하여 계승하였고, 정신적으로는 불교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범생명적인 통찰에 다다르게 되니, 남부지방의 온화한 자연을 바탕으로 목가적인 낙원의 정경을 자기의 화풍으로 확립하게 되었다.
    그가 술회하길, “나는 불교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려고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나의 그림은 불화며 단청의 장식성이 바탕이 되었지만, 유정무정(有情無情)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는 불설처럼 불교적인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려는 것이다.”라고 했다(나의 비망록, 1975. 4. 24, 국제신보).


    IV. ‘선전’이후 관전과 거리를 두어 오던 그가 1957년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목가적인 화풍과 전혀 다른 계몽적인 성향의 ‘잠시’를 출품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하고 입선에 그치고 만다. 한 여름철 농촌의 농부들이 밭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근육질 농사꾼의 강인한 생명력과 노동의 가치를 예찬한 이 작품은 경제적 궁핍과 도탄의 시기였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새로운 농촌의 건설을 위한 사회적 발언을 담고 있다. 국전의 주류 경향과 뚜렷한 차별을 둔 이 작품은 1980년대 민족미학을 기조로 현실과 발언을 중시한 민중미술의 선구적 사례가 될 수 있겠다(발표된 후 43년만인 2010년 7월 필자에 의해 우연히 발굴되기 전까지 이 작품은 잊혀진 상태였다).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한 ‘한국근대미술 60년전’에 ‘목동’이 초대되었으며, 1973년에는 ‘현대작가 100인전’에도 초대된다. 아울러 1974년에는 비로소 국전에 초대작가로 추천되어 오랫동안 지역에서 활동하던 그의 작품세계가 평가되고 공인되는 자리를 얻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성취로 1976년에는 ‘눌원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만년에는 지병인 고혈압으로 거의 붓을 놓다시피 했으며, 1984년 4월 2일 밤, 마음으로 그려왔던 ‘낙원’을 찾아서 무던히도 굴곡 많았던 1세대 부산미술가로서의 삶을 마친다.


    <참고문헌>
    1. 양달석, ‘청춘은 아름다워라’/나의 비망록, 국제신문 1975.4.7-4.26
    2. 양달석,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 선집/62권, 금성출판사, 1979
    3. 한국근대미술 60년전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1973
    4. 향토적 주제의 회복, 한국현대미술전집 11권, 한국일보사, 1976
    5. 부산작고작가전(1) 도록, 부산문화회관·용두산미술전시관, 1992
    6. 양달석화백유작전 도록, 동서화랑, 한일문화사, 1995
    7. 근대를 보는 눈/한국근대미술-유화, 국립현대미술관, 삶과 꿈, 1991
    8. 한국근현대미술기록연구회, ‘제국미술학교와 조선인 유학생들’, 눈빛, 2004
    9. 옥영식, 평문집 ‘부산미술의 표정’, 보광출판사, 2001
    10.옥영식, 평문집 ‘부산미술의 면모’, 도서출판 지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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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옥영식(미술평론가)
    부산미술과 문화에 대한 현장비평을 주로 하여 글쓰기를 하였으며, 부산미술포럼 공동대표, 부산청년미술상 운영위원장, 부산미협 학술평론분과회장을 역임. 경성대학교와 동아대학교 예술대학·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였고, 평문집으로 ‘부산미술의 표정’ ‘부산미술의 면모’가 있다.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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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사항 - 학습기간, 학교, 전공, 학위,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학습기간 학교 전공 학위 비고
1932 일본 제국미술학교 입학(중퇴)
1925 진주국립농업학교 입학(3년 중퇴)
1923 통영공립보통학교 졸업

주요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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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활동사항 - 년도, 활동내역,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년도 활동내역 비고
1976 제18회 눌원 향토문화상 수상
1974 국전 초대작가
1973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현대작가 100인전에 출품
1972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근대미술 60년전에 '목동'초대 출품
1969 부산 광복동 보리수다방에서 회갑기념전 개최
1962 사회유공표창(도지사)및 경상남도 제1회 문화상 수상
1960 동화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959 송혜수, 조동벽과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독립작가 3인전 개최
1957 제6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입선
1953 해군종군 개인전 개최
1942 1942-1943 제11,12회 일본 동경 독립미술협회전 입선
1939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1938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1932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입선
1932 11회 조선미술전람회 '전원의 사랑' 입선
1927 대판신문사 주최 전일본 중등학교 미전 특상 수상
1924 전조선 소년미전 최고상 수상

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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