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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상

문학예술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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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조갑상

  • 이름조갑상
  • 생년월일 1949년
  • 출생지경남

인물소개

  •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요산문학관 관장
    부산소설가협회장 역임
    부산작가회의 회장 역임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혼자웃기」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1982년 -1986년 : 부산여자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2013, 제28회 만해문학상 수상
    2013년 3월 인물스페셜

    백자같이 은은한 그 소설적 무늬
    ― 소설가 조갑상

    갑상. 이름이 특이하다.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을’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데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갑’이라니.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상’자까지 턱하니 붙여놓았으니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뭔가 남다른 탄생설화나 태몽이 있을 듯했다. 그래서 묻고 말았을 것이다.

    “에이, 무슨 그런 쓸데없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그래? 갑(甲)은 12간지의 갑도 되지만 ‘갑옷 갑’ 자로 볼 수밖에 없지. 형제 중에 맏이도 아닌 셋짼데. ‘상’ 자는 돌림자야. 더군다나 한자로는 ‘위 상(上)’도 아닌 ‘서로 상(相)’이고. 모친으로부터 처음으로 산파를 모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태몽 같은 걸 꿨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 태몽 뒤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면 아마 사는 게 지금보다 훨씬 무거웠겠지. 안 그래?”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다. 게다가 대학 연구실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시쳇말로 ‘꼰대’ 신세라고 덧붙이니,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닌 성싶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게 다 의뭉일 수 있다. 워낙 언어를 부리는 데만큼은 눙치는 재주를 타고난 양반이니까. 물론 그가 모임에서 앞장서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아니다. 단지 적절한 상황에 약간의 위트를 가미한 멘트를 날릴 뿐. 구구절절 길지도 않으면서 짧다면 짧은 한마디가 좌중들로 하여금 까르르 웃고 노래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는 사람의 심장을 은근히 쥐었다놓았다 하는 묘한 재능을 가졌다고나 할까.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전후의 혼란기라 뻑하면 자습이야. 그때 내가 교단에 나가서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내가 얘기를 하면 이상하게 아이들이 집중하곤 했거든. 그때부터 이야기꾼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중학교 때 <학원>지에 내 글이 실리자 대학에 간다면 서라벌예대로 가야지 하고 맘먹었지, 허허허.”

    당시 <학원>지에 글깨나 발표하던 문재(文才)들이 죄다 모여들었다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 고교생이 된 그는 거기로 진학해 소설가가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종합대학 아니면 서울로 보내주지 않겠다는 ‘협박’에 결국 중앙대 철학과를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중앙대 2학년 진급 전, 미아리에 위치한 서라벌예대에 원서를 넣게 되고 부모님이 준 등록금을 입학금으로 전용해버린다. 그때 그는 다짐에 다짐을 했다. 졸업 전에 반드시 소설가로 되리라고. 문창과에 입학한 그는 거기서 시인 오정환, 이시영, 소설가 송기원 등의 문우와 교류하고 김동리, 안수길, 이호철, 유주현 선생님으로부터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는다. 하지만 졸업 전 등단 목표는 끝내 이루지 못한다. 1976년에 졸업한 후 경남 의령 정곡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한다. 꿈을 포기할 수 없어 퇴근하면 책상에 앉아 밤새 소설을 쓰고 또 썼다. 지난한 창작은 부산으로 직장을 옮긴 다음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혼자 웃기」로 당선된다.

    “원래 마산에서 태어났어. 공무원인 아버지 때문에 부산으로 오게 된 거지. 동구 수정동에서 제법 오래 살았어. 그때 당시만 해도 철도와 부두, 미군부대 등에 나가는 아버지들도 많았었고. 「혼자 웃기」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광복동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친구를 설득하러 가는 동서기가 같이 자랐던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야. 도시 빈민 2세대, 철거, 외로운 청춘, 뭐 그런 얘길 하려고 했었지.”

    그의 독특한 소설적 서사는 등단작에서부터 드러난다. 김경수 평론가의 지적처럼, 조갑상 소설가는 결코 소재의 신기성(新奇性), 긴박한 소설적 전개, 사건의 중첩과 놀라움, 혹은 반전의 결말 등과 같은 손쉬운 독자 편의 요구에 호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들과 취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우리 삶에서 온전히 포착될 수 없으며, 오히려 선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플롯을 위반하여 인간 개개인이 곱씹어가면서 스스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삶의 문제를 담담하게 제시해낸다. 어쩌면 이런 소설관이 그를 일반 독자와의 거리를 두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내장하고 있는 작품성만은 이미 평론가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 있다.

    “박완서 선생 말마따나 ‘소설가는 허가 받은 거짓말쟁이’지. 하지만 아무리 소설이 허가받은 거짓말일지라도 독자로 하여금 삶의 모순이나 우리 사회의 표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상상력이 필요해. 작가야말로 자신의 고민을 세상과 나누면서 또한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수용해야지, 작품세계가 어떠하다는 걸 제 입으로 말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걸 또 누가 믿어주겠나. 그런 걸 생각하면 소설을 함부로 써선 곤란하지. 소설이야말로 복잡한 논리적 거짓말의 구성물이니까.”

    그의 소설적 문장은 쫀쫀하기로 유명하다. 문장과 문장은 작은 흠 하나 없이 잘 연결돼 이음새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서사적 흐름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문장들이 모여 만든 한 편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요란스러운 무늬를 아로새기진 않는다. 그러니 조선의 백자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은은한 소설적 무늬를 간과할 수밖에. 오직 예리한 안목의 소유자만이 돌올하지 않지만 아련하게 새겨진 무늿결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조갑상 소설가의 독창적인 소설적 무늬를 김중하 평론가는 극찬한다. “누군가에게는 쉽게 보이는 길이 누군가에게는 미로가 되는 것처럼 저 양반이야말로 쉽게 쓰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고수의 솜씨를 드러내는 양반”이라고.

    그는 지금껏 세 권의 소설집과 두 권의 장편소설, 그리고 네 권의 산문집과 연구서를 펴냈다. 그러면서도 한사코 ‘문단의 오지’ 같은 부산을 고집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향파와 요산의 계보를 잇는 부산의 대표적 소설가로 꼽을 만하다. 아니, 그가 남긴 현재까지의 족적만으로도 그들의 업적에 버금간다. 그가 나타남으로써 부산에 흩어져 창작하던 소설가들을 연결해 부산소설가협회라는 별자리를 만들었으며, 발표지면 확보라는 숙원의 사업을 소설전문 계간지 󰡔좋은소설󰡕 창간으로 이뤄냈으니까.

    “지역의 소설가라는 게 자영업자 처지나 마찬가지야. 문을 열고 있지만 막상 망한 거나 뭐가 달라. 발표 지면이 없는데 창작 의욕이 생길 수 있겠어? 그러니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등단한 후 얼마 뒤면 그냥 기권 선언을 하고 슬그머니 사라져버리지. 내가 겪은 고통을 후배작가들에게까지 대물림해줄 순 없었어. 그래서 시작한 거야.”

    역시 그는 생각의 각도가 예리하고 사유의 깊이 또한 남다르다. 당신의 처지보다 후배의 ‘문학적 생존’을 먼저 생각하다니. 이런 후배 사랑도 어쩌면 그의 머리보다 가슴이 시킨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처음 보면 깐깐한 양반으로 착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외양상 강마른 체격에 목소리조차 낮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그와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으면 누구보다 정이 많은 위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더라. 때마침 후배소설가 하나가 한창 창작에 ‘올인’할 나이에 덜컥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다들 한숨만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유달랐다. 소식을 들은 그가 가슴 어딘가가 깊이 파인 것인지 흐흑, 하고 울음보를 터뜨린 것이었다. 그는 눈치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는 듯 얼른 눈가를 훔쳤지만 나는 보고 말았다. 슬픔이 잔뜩 묻은 눈물방울이 구두코 위에 떨어지는 것을. 그는 그 뒤에도 한참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충격을 받은 자신의 심장을 꼬옥 끌어안고 달래는 것처럼. 술자리가 적막강산으로 변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문단 심부름꾼 노릇을 너무 오래했어. 근데 정태규 소설가가 등단한 거야. 얼마나 반가웠는지 옳다구나 싶어 얼른 짐을 떠넘겨버렸지. 그랬는데 이 친구가 루게릭병에 걸렸다니 마음이 안 아리겠어? 고생시킨 걸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퍽, 눈물이 솟더구먼. 허허허.”

    그는 무안한지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 그는 착하디착한 심장을 지닌 작가다. 그의 곁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실핏줄 속으로 흐르는 정이 느껴질 정도로. 그가 건네는 말 또한 끈끈한 성분 같은 게 있어서 사람을 은근히 달라붙게 만든다. 그렇다고 후배들에게 정만 쏟는 것은 아니다. 후배작가의 태작(怠作)에 대한 따끔한 충고로 잊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말이 얼마나 맵고 따가운지 문신처럼 가슴에 새겨질 정도다.

    “고인 물은 밟아줘야 튀는 법이지. 안 그러면 발전이 없어. 그러니까 이제 육십이 넘은 내가 먼 길을 동행할 후배들에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이런 악역이라도 맡을 수밖에.”

    맞다. 그게 선배의 역할이고 부산소설을 기름지게 하는 일이다. 그게 그의 책무임을 알아서일까. 지금도 그는 소설을 놓지 않고 산다. 창작은 쓰기와 읽기를 병행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듯이, 계절마다 발간되는 계간지를 여전히 읽으며, 출간되는 신간소설들까지 족족 사다가 훑는다. 그런 사실은, 만날 때마다 누구의 소설을 읽어봤냐고 그가 먼저 묻고 나서니 알 수밖에. 그런 면에서 그는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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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상섭(소설가)
    1961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2002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슬픔의 두께』『그곳에는 눈물들이 모인다』『바닷가 그집에서, 이틀』이 있으며, 르포집 󰡔굳세어라 국제시장󰡕이 있다.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백신애문학상, 2012아르코문학상을 수상했다.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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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사항 - 학습기간, 학교, 전공, 학위,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학습기간 학교 전공 학위 비고
1992 동아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1976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주요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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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활동사항 - 년도, 활동내역, 비고을(를) 상세히 나타낸 표입니다.
년도 활동내역 비고
2013 (사)한국작가회의 자문위원
(사)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2011 제10회 이주홍문학상 본상 수상
2010 제53회 부산시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2007 부산소설가협회 회장
2004 (사)요산기념사업회 상임이사(2004~2007)
2003 제20회 요산문학상 수상
2000 요산 김정한선생 생가복원 및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발기인, 이사
1998 (사)민족문학작가회의 부산 지회장
1997 제2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
1993 요산문학상 운영위원회 간사(1993~2002)
1984 부산소설가협회 사무국장(1984~1993)

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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